[소설] 보은 판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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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낮이 아닌 밤이다.
봄의 계절 4월에 접어들어 꽃향기가 그윽하고, 산들바람이 부는 시원한 밤이다.
“오, 그게 정말이야?”
“응, 그렇다니까?”
보은(報恩), 이곳은 보은이다.
대한민국 한반도를 닮은 땅 충청북도 그 안에
이름조차 잘 알려지지 않은 작은 고장.
“아빠, 아빠! 문화예술회관에서 ‘괴물’상영한대요!”
“그래? 그럼 우리 보러갈까?”
“네! 팝콘도 사가요~!”
“엄마, 저기 별 좀 봐!”
“어머, 우리 수연이를 꼭 닮았네?”
“와아, 정말?”
“당연하지!”
진보랏빛 밤하늘이 내려앉은 뱃들공원은 봄이 찾아온 4월의 밤이라 해도
한산하기만 했고, 단지 운동을 즐기러 온 몇몇 사람만 눈에 띄었을 뿐이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파앙- 파앙-!
“어머, 불꽃놀이 한다!”
“아앗, 보러가자~!
빨리 뛰어!”
총총히 별이 박혀있는 하늘 아래 넓은 잔디밭. 그 위에 돗자리를 펴고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이 즐비했다.
도시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아름다운 밤하늘. 그리고 그 밤하늘을 다채로운 빛깔들이 수놓는다.
“와아, 풀빵 맛있겠다!”
“우리 사먹자!”
축제 분위기,
그러나 여느축제와는 무언가 사뭇 다르다. 무엇이 다를까.
뱃들공원에서 열리는 축제는 365일 멈추지 않는다는 것. 그것이 여느 축제와는 다를 것이다.
[영화 ‘괴물’이 상영 중입니다. ‘괴물’이 끝난 뒤에는 사물놀이 무대가 이어지겠습니다.]
보은문화예술회관의 모습이 전과 다르다. 뱃들공원에 사람이 붐비고, 그만큼 좌석이부족해지다 보니 개축하게 된 그 모습이 자못 웅장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많은 공연이 끊이지 않는 만큼, 문화예술회관을 둘러싸고 있는 먹거리 가게는 풍부했다.
[영화 상영 후 : 흥겨운 우리가락에 빠져볼 수 있는 시간, 사물놀이의 무대입니다.]
문 위에 자리 잡아, 실시간 안내판의 역할을 톡톡히 해주고 있는 네온사인의 화려함은 사람들의 눈길을 잡아끌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와아, 신기하다!”
뱃들공원 공터 정 중앙에 많은 사람들이 몰려있다.
* * *
“와아.”
나는 뱃들공원 곳곳을 다니며 그 모든 모습을 두루 살펴보았다. 보은엔 다섯 살 때부터 살아온 나였지만, 무엇인가 부족한 관광지라고 생각했던 보은에서 이런 모습을 매일 매일 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보은만 해도 이제 계속하여 새로운 감회가 드는데, 최고의 관광지라고 하는 속리산의 화려한 모습엔 도대체 언제 적응할 수 있을까?
“정말 대단해!”
나와 같이 어울리며 놀던 아이들은 모두 집으로 돌아갔지만, 나는 집이 가까운 터라 조금 더 구경을 하고 가려고 이곳에 남았다. 이 곳 저곳을 구경하다 보니 다리가 저려 벤치하나를 골라 그 곳에 편히 앉았다.
나는 기지개를 켠 뒤, 어깨에 메여져 있던 가방에서 다이어리를 꺼냈다.
“…소희와의 약속, 소희와의 약속. 어디 있지? …아, 여기 있다!”
오랜만에 소희와 같이 속리산에 가기로 약속했는데, 멀게만 느껴졌던 그날이 벌써 내일로 다가왔다. 가슴이 쿵쾅거린다. 버스 정류장에서 내일아침 7시에 만나기로 했는데, 벌써 9시다. 일찍 일어나려면 일찍 자야하니, 이젠 집으로 가야겠다.
“으음, 그런데….”
왜 이렇게 졸린 걸까? 아아, 오늘 하루 종일 신나게 놀아 피곤한 거구나. 그렇지만 여기서 잠들면 안 되는데….
벤치에서 편하게 쉬고 있다 보니, 나도 모르는 사이 어느새 온몸이 물먹은 솜처럼 무거워져 버렸다. 몸을 뜻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하암…….”
하픔을 했는데, 그와 동시에 눈이 스르르 감겼다. 그 순간, 사람들이 세상에서 가장 무겁게 느끼는 건 ‘눈꺼풀’이라고 누가 말했던가? 역시나, 틀린 말은 아니었나 보다. …도저히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이 녀석이?”
그런데, 눈이 완전히 감기기 전 왠지 약간 화가 난 아빠의 목소리와 얼굴을 본 것 같다.
그것은 피곤한 탓에 본 환영이었을까? 으음, 모르겠다.….
보은환타지 ... (2)
삐리릭- 삐리릭-
알람시계가 시끄럽게 울렸다. 나는 상체를 일으켜 버튼을 눌러버렸다.
“으음….”
삐리릭- 삐리릭-
나의 손길을 무시하기라도 하듯 알람시계는 계속 울려대며 더욱 시끄럽게 내 귓전을 파고들었다.
“하암….”
긴 하품을 하며 잠에서 깨어난 나는 큰 기지개를 펴며 책상위에서 울고 있는 아기도깨비 모양의 시계를 바라보았다.
“헉!”
순간, 시곗바늘이 가리키는 시간을 확인한 짧은 신음을 내뱉어야만 했다.
* * *
“55, 56, 57, 58….”
“소희야!”
“59, 60…. 너, 왜 전화도 안 받았어?”
“미안, 그게….”
나는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변명을 하려했지만, 소희가 내 말을 가로채며 말했다.
“알았어, 이번만 용서해주는 거다?”
마치 선심을 쓴다는 듯한 어조였다. 왠지 그 말에 더 미안해진 내가 조그마한 목소리로 다시 사과를 건네자, 소희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내 손을 잡아끌며 정류장을 향해 달렸다. 그런데 순간, 내 주머니에서 무엇인가가 떨어지는 것이었다.
“엇, 뭐지?”
그것은 내가 발전 된 속리산을 상상하며 예전에 컴퓨터로 합성해보았던 사진이었다.
말티고개 위에 어색하게나마 이어붙인 리프트 사진, 그 땐 정말 상상일 뿐이었는데…
“뭐하는 거야, 이러다가 정말 차 놓친다?”
“응, 알았어!”
소희의 말에 나는 사진을 주워들고 다시 신나게 뛰었다. 왠지 무적 즐거운 시간이 될 것이라는 생각에 웃음을 머금고 말이다.
* * *
빨간색 버스 계단 위에 올라섰다. 슬쩍 뒤를 돌아보니 많은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다.
나와 소희는 뛰어오자마자 곧바로 줄을 섰기 때문에, 차를 쉽게 탈 수 있었다. 그렇게 설레이는 기분으로 좌석에 몇 분을 앉아 있었을까.
버스는 손님이 모두 올라오기를 기다리는 듯싶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부르릉 소리를 내며 부드럽게 출발했다.
삶은 계란을 꺼내먹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타이밍 좋게 장재리에 도착했다.
"장재리 주차장입니다. 손님여러분들은 내려주시기 바랍니다."
버스 기사아저씨의 활기찬 목소리는 시원한 공기만큼이나 우리들의 마음을 싱그럽게 했다.
나와 소희는 맑은 공기를 마시며 차에서 내렸다.
“…차?”
그곳은 더 이상 예전의 논밭이 아니었다. 어느새 넓은 주차장으로 개발된 그곳에는 이미 수백 대의 차가 정차해 있었다. 아직 이른 시간인데 벌써 이렇게 많은 관광객이 몰려들었다니,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우와, 진짜 많네?”
소희 역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렇게 승용차와 버스들이 많다면…. 속리산은 벌써 많은 사람들로 붐비고 있겠네? 일찍 왔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입을 삐죽이며 말하자, 소희는 생글 웃으며 말했다.
“에이, 사람이 없으면 또 무슨 재미가 있니?”
“그런가…?”
소희의 말에 수긍하게 된 나는 편안한 마음으로 이곳의 풍경을 둘러보았다. 예전의 멋없던 주변 환경은 사라지고, 무릉도원이라 불리는 속리산의 입구답게 잘 정돈 되어있었다.
내가 여유롭게 풍경을 둘러보던 중 장재리 저수지 제방의 글이 눈에 띄었다. 저수지의 제방에는 “여기서부터 속리산의 아름다움이 시작됩니다.” 라고 쓰여 있었고, 그 문구를 둘러싸듯이 피어있는 작고 앙증맞은 꽃들이 속리산 입구의 분위기를 한층 더 신비롭게 해주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아름다운 모습의 주변으로는, 예전 세조임금님께서 행차하실 때 하룻밤의 임시 거처가 되어 그 이름이 붙여진 대궐터 상가가 있어 속리산을 찾은 많은 관광객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나와 소희는 그 모습을 보며 조금 쉬어갈까 생각하고 벤치에 앉았다.
“이상하다. 왜 차가 다 여기에 주차되어 있는 걸까?”
내 중얼거림을 소희가 들었는지 자신만만한 어조로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보은환타지 ...(3)
이상하다. 차가 왜 여기에 다 주차되어 있는 걸까?”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소희에게 물었다.
“소희야.”
“응?”
“왜 차를 여기에 모두 주차해 놓은 거야?”
“바보야, 그것도 몰라.”
소희는 내 질문이 어이없다고 생각했는지, 바보라는 말에 악센트까지 넣어가며 핀잔을 주었다.
“속리산은 맑고 깨끗한 공기를 보호해야 하는 의무가 있으니까, 주차장을 속리산과 조금 떨어져 있는 곳에 마련해 놓은 거야.”
“그래?"
"......."
"그런데 차를 탈 수 없으면 속리산 안에선 뭘 타고 다녀?”
“예쁜 전기자동차와 웰빙 자전거가 있잖아.”
소희의 간단명료한 대답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와 소희는 서로의 손을 잡고 리프트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소희와 조잘거리며 떠드는 것이 어찌나 재미있었던지, 줄을 서서 기다리긴 했어도 지루함 같은 것은 느껴지지 않았다.
“자아, 얘들아.”
리프트 옆에 서있던 안내원 언니가 리프트 의자에 앉으라고 신호를 보냈다. 우리의 앞에 다가온 리프트는 예쁜 분홍색이었다. 나는 떨리는 마음으로 의자에 앉아 안전벨트를 맸다. 심호흡을 하긴 했지만, 막상 이 곳에 앉고 나니 들뜬 마음 때문에 심장이 쿵쾅거렸다.
“조금만 기다리세요.”
잠시 뜸을 들이던 안내원 언니가 신호를 보내자 가만히 있던 리프트는 약한 진동소리와 함께 ‘우우웅’하며 움직이기 시작했고, 그와 동시에 소희의 손을 잡은 내 몸도 흠칫 떨렸다.
“…와!”
리프트가 제방을 오를 때, 가느다란 탄성이 내 입술을 비집고 터져 나왔다.
‘여기서부터 속리산의 아름다움이 시작됩니다.’ 라고 쓰여진 아름다운 제방과 주변 환경은 위에서 보는 느낌이 무척이나 색달랐다.
“…와!”
장재리의 재방을 넘는 순간, 더 호들갑스러운 탄성소리가 여기저기서 튀어나왔다. 아름다운 호수가 우리 앞에 펼쳐진 것이다. 푸른색으로, 어찌 보면 비취색의 빛깔처럼 연한 녹 빛으로 반짝이고 있는 작은 호수는 나와 소희의 눈을 더욱 휘둥그레지게 만들었다. 호수의 중앙에서 힘차게 물을 뿜고 있는 분수사이로 튀어 오르는 물방울이 햇빛을 받고 시리게 빛나고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수없이 쏟아져 나오는 백옥 같기도 했다. 또한 위엄 있는 분위기의 커다란 분수와, 그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작은 분수들이 조화롭게 어우러져 물을 뿜어내고 있는 모습은 마치 오밀조밀한 꾸밈새의 아름다운 왕관을 연상시키고 있는 듯도 했다. 예전의 밋밋하기만 하던 저수지가 저렇게 변할 줄을 누가 상상이나 해보았을까? 나는 수려한 모습의 호수를 보고 신선한 충격을 받아서 그런지 한층 더 여유로워진 마음으로 말티고개를 구경할 수 있었다.
“호오!”
긴장을 풀었다지만, 이번에도 탄성을 아낄 필요는 없었다. 말티고개 굽이굽이에 피어있는 많은 종류의 꽃나무들,분홍색, 노란색, 흰색…, 가지각색의 뽀얗디 뽀얀 꽃들이 각자 자신들의 아름다운 모양새를 자랑하듯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봄에 피는 꽃나무란 꽃나무는 모두 모여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얼른 디지털 카메라를 꺼내들었다. 한 고개, 두 고개, 세 고개…. 열두 고개를 마지막으로, 나는 12장의 사진을 한 장도 빠짐없이 모두 찍어냈다.
“너 대단하다. 다 찍었어?”
“응, 전부다 깨끗하게 나왔어.”
“좋겠다…. 난 반 이상이 흐리게 나왔는데.”
그렇게 아름답기 그지없는 말티재 풍경을 사진에 담는 사이 몇 분이 지났을까. 리프트는 천천히 정지선을 향하고 있었다.
보은 환타지 ...(4)
그런데 바로 그 때 내 눈에 띈 것이 있었다.
“정거장?”
딱히 그렇게 적혀있었던 건 아니다. 그렇지만, 내 눈엔 마치 그렇게 보였다.
말티재를 오르던 리프트가 서서히, 그리고 부드럽게 정상에서 멈추었다.
나는 소희와 손을 잡고 조심스럽게 내렸다.
안내원언니가 우리를 맞으며 상냥한 미소를 지어주었다.
“왼쪽을 통해 관문으로 들어가 주시기 바랍니다.”나와 소희는 언니의 지시에 따라 왼쪽으로 방향을 바꾼 뒤 걸음을 옮겼다. 곧이어 문이 나타났는데, 그 문은 활짝 열려있었다. 나와 소희는 조금 의아함을 느끼면서도 곧장 그 안으로 들어갔다.
“…휴게실?”
그랬다. 겉모습만으론 짐작할 수 없었던 그곳은 바로 휴게실이었다. 일찍 출발하느라 아침식사를 하지 못한 사람들이 컵라면 대신 영양만점의 국밥을 먹거나, 멋스럽게 꾸며진 테이블에 앉아 모락모락 따뜻한 김이 나는 각종 차(한방차 솔잎차)를 즐기고 있었다.
어린아이들은 금방 만들어내고 있는 뜨거운 국화빵, 풀빵이나 붕어빵을 파는 제과점 앞에 바글바글 모여 있었다.
불량식품이라면 질색을 하던 엄마 아빠도 빵을 맛있게 먹는 아이의 얼굴을 바라보며 선뜻 지갑을 열었다.
휴게실 안에서 어린이들에게 맛있는 빵을 대접하고 있는 인심 좋은 아주머니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져있었다.
나와 소희 역시 입맛이 돋아 풀빵 열 개를 저렴한 가격에 사서 나누어 먹었다. 도중에 다리가 저려온 나는 휴게실 안의 테이블에 앉았다.
“응?”
내 눈에 깔끔한 신발 밑창이 눈에 들어왔다. 오늘 처음 신고 온 새 신발이다. 그런데, 아무리 새신발이라고는 하지만 이렇게 깨끗하다니? 문득 의아함이 든 나는 아래를 내려다보았는데, 아니나 다를까. 휴게실 바닥은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관리하기에 이렇게 청결히 유지가 될까 궁금할 정도였다. 여느 휴게실과는 다른 깔끔한 모습에, 내 입에 저절로 미소가 번졌다.
나와 달리 휴게실 안을 돌아다니며 풀빵을 먹던 소희가 내 앞에 다가와 무언가를 가리켰다.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었다. 왜 지금에야 발견했나 싶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넓은 계단을 통해 오가고 있었다.
“내려가 보자!”
소희는 나를 잡아끌며 넓은 계단의 손잡이를 잡아가며 아래로 타닥타닥 내려갔다. 손에 쓸리는 원목의 감촉이 부드러웠다.
“밖이구나!”
계단을 내려가자 보이는 것은 머리 위의 리프트와 오가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었다. 내가 조금 더 앞으로 나가 속리산 관문을 돌아보자, 관문의 멋진 미(美)를 제대로 감상 할 수 있었다.
“오호!”
관광객들의 발걸음이 대부분 속리산의 관문 앞에서 멈췄고, 그들의 입에서는 제각기 다른 느낌이 감탄사와 탄성이 쏟아져 나왔다. 그것은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옛 조선왕실의 왕이 머물곤 하였던 ‘궁[宮]’ 처럼, 관문의 모습은 장엄하기 그지없었다. 널찍하게 뚫려있는 통로에는 많은 사람이 드나들고 있었고, 통로 위에는 멋들어진 글씨체로 ‘속리산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라고 쓰여져 있었다. 통로의 양쪽에는 남자 화장실과 여자화장실로 구성되어 있었다.
한마디로 겉모습은 아주 경탄스러우면서도 속 알맹이는 무척이나 실속 있는 모양새라고나 할까?
양쪽에 산등성이를 끼고 있는 관문은 ‘성’ 같았다. 내가 리프트에서 내린 곳을 바라보니 그곳 역시 많은 사람들이 왕래 하고 있었다.
소희와 나는 서로의 손을 잡고 통로를 지났다. 통로를 지나자, 나무가 우거진 숲속의 멋진 풍경 속에서 웃음 지으며 가족사진을 찍는 많은 사람들이 보였다. 그렇지만 제일 먼저 눈에 띈 것은, 푸른색 미르머리를 단 청룡열차였다.
통로를 지난 많은 사람들이 그곳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나와 소희는 나란히 줄을 섰다.
밀린 사람이 많아 한참을 기다려야 할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줄을 서고 나서 채 십 분이 지나기도 전에 내 차례가 다가왔다. 이곳에서 안내를 맡고 있는 언니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탑승해주세요.”
내 옆에 있던 소희가 먼저 자리에 앉고는 기대된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나 역시 즐거운 마음으로 자리에 앉았다. 푹신한 감촉이 기분 좋게 느껴졌다.
비교적 뒷자리에 앉은 내가 청룡열차 한대의 자릿수를 세어보았는데, 어림잡아도 백 명 정도는 거뜬히 탈 수 있을 것 같았다. 놀라운 정원수에 내 눈이 동그래졌다.
보은환타지 ... (5)
“안전벨트를 매 주십시오.”
여기저기서 조잘대는 시끄러운 소리를 파고든 것은 마이크에서 울리는 안내원 언니의 또렷한 목소리였다.
나는 언니가 내린 지시에 따라 소희와 함께 안전벨트를 맸다.
스르릉-
철- 컥
설레는 기분으로 긴장을 하며 자리에 앉아 있는 사이, 어디선가 철과 철이 맞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를 듣자 나는 두근거리던 심장이 더욱 거세게 뛰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출발합니다.”
드디어 청룡열차가 레일위에서 부드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열차가 점점 앞으로 나아가자, 긴장감 때문인지 열차를 탄 사람 모두가 숨을 죽이는듯했다.
시이잉-
열차는 서서히 속도를 냈다. 그러면서 가속도를 붙였다.
나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을 것만 같은 느낌에 속이 울렁거렸지만, 신나는 스릴감 때문에 즐거워할 수 있었다. 내 옆에 앉아있는 소희도 겁이 난 듯, 두 손을 꼭 쥐고 있었다. 그 모습에 웃음이 났지만 애써 참았다.
쌔애앵-
급경사, 급경사였다.
많은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비명을 질렀다. 그것은 대학생 언니들이 타고 있는 앞쪽 자리가 더 심했다.
시이잉-
청룡 열차는 내리막 코스 중 가장 큰 묘미를 느끼게 해 주는 마지막 경사면을 향해 더욱 세차게 내려갔다.
비명소리가 더욱 요란하게 들렸다. 그런데 열차가 갑자기 멈추는 듯싶더니, 내 몸이 앞으로 쏠리며 열차의 속도가 순간 급격히 줄어들었다.
슈우욱-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내 귀에 생생하게 들려오더니 울리던 가슴이 진정되며 주변을 둘러볼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어린아이들이 무서워하지 않을 만큼의 속도, 그러면서도 결코 느리지 않는 속도로 청룡열차는 점점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다.
“우와!”
갑자기 여기저기서 탄성이 쏟아져 나왔다. 나는 깜짝 놀라 두 눈을 휘둥그레 뜨며 주변풍경을 바라보았다.
“와”
탄성이 터져 나올 만 했다. 청룡열차가 천천히 스쳐 지나가자 주변 환경은 빨강색, 파란색, 노란색, 주황색, 분홍색, 하얀색 등의 총 천연색의 꽃들로 아름답게 수놓아져 있었는데 마치 동화 속에서나 볼 수 있을 것 같은 신비로운 풍경이 내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튤립은 목을 길게 빼어내어 우리에게 인사를 하는 듯 했고, 올망졸망 피어있는 물망초는 햇빛을 바라보며 수줍게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그 이름도 예쁜 쇠별꽃은 맑은 하얀색의 꽃잎 때문인지 밤하늘에서 하얗게 빛나는 별처럼 수천 송이가 나란히 피어있어 신비로움을 더해주었으며, 귀여운 이름의 앵초는 분홍빛 하트모양의 꽃잎을 달고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이곳저곳 홀로 피어있는 애기나리는 왠지 더욱 신비로워 보였고, 그 옆으로 귀엽고 앙증맞은 보랏빛 제비꽃들이 지천으로 널려있어 애기나리꽃의 외로움을 감싸 안아 주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 보니 혹시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순간 은은하게 풍기는 꽃의 향이 나를 다시 깨웠다. 다시 한번 와 하고 긴 한숨을 내어 쉬는 순간,
“사슴이다..”
3살 남짓 되어 보이는 어린 남자아이가 손뼉을 치며 침묵을 깼다. 둥그런 눈동자의 시선이 향한 곳은 소나무 숲 한가운데였다.
지천으로 피어있는 꽃밭 사이로 수십 마리의 꽃사슴이 노닐고 있었다.
부부처럼 보이는 숫 사슴과 암사슴은 나란히 서로를 보듬어주고, 어린 사슴은 그 주위를 앙증맞게 뛰어다닌다. 그렇게 꽃과 어우러진 사슴들의 움직임은 생동감으로 인해 더욱 아름다웠다.
기다란 목을 가진 귀여운 꽃사슴이 빼꼼히 우리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많은 사람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한줄기 바람을 맞은 꽃잎이 부드럽게 춤을 추며 아지랑이와 함께 날아올랐다. 살랑 살랑 날아오른 꽃잎은 맑은 연못 위에 동동 떠올랐다.
보은환타지 ... (6)
자그마한 공간들을 이용해 예쁘고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꽃밭들이 열차의 양 옆을 천천히 스치고 지나갔다.
귀여운 토끼풀이 잔뜩 피어있는 초록빛 언덕을 두고 도라지 꽃, 할미꽃, 철쭉꽃들이 산에 들에 지천으로 피어있다. 그 주변을 산들바람에 부딪겨 일렁이는 노란 유채꽃들이 햇빛을 받아 황금빛 가루를 뿌려 놓은 것처럼 눈부시게 빛나고 있는 모습이 장관을 이룬다.
눈꽃처럼 고운 빛을 띄며 피어있는 하얀 튤립이 계속 피어져 있었고, 별들이 반짝이고 있는 듯 한 쇠별꽃, 귀여운 이름을 따라 생김새마저 귀여운 애기나리, 매혹적인 붉은 빛을 띄는 장미 수백송이가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길을 제외하고는 모든 공간을 장식하고 있다. 그 모습을 넋을 잃고 바라보던 소희가 나를 툭툭 건드리며 내 이름을 불렀다.
“왜 그래?”
“저길 자세히 봐!”
나는 소희의 손가락 끝을 따라 울창한 숲 사이로 시선을 옮겼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무언가를 가리고 있어 무엇을 가리키는 지 잘 보이지 않았다. 소희는 눈을 빛내며 말했다.
“조금만 기다려봐!”
“뭔데 그래?”
나는 퉁명스럽게 대답 하면서도 눈을 크게 뜨고 그 곳을 바라보았다. 도대체 무엇이 신기한 건지 웅성거리며 모여 있던 사람들이 흩어질 즈음, 나는 그 사람들의 사이로 가려져 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알 수 있었다.
“우와! 아까 본 사슴이야?”
“응? 저건 사슴이 아닌데?”
꽃을 둘러싸고 있는 숲나무 아래, 조금 전 봤던 사슴들과는 다르게 생긴 사슴들이 눈에 띄었다. 나는 사슴이 아니라는 소희의 말에 반문했다.
“그럼 뭔데?”
“고라니 같아.”
나는 소희의 대답을 듣고 나서 다시 고개를 돌렸다. 확실히, 뿔이 없는 머리나 바둑무늬가 없는 몸은 사슴과 달랐다. 하지만 순한 눈망울만큼은 사슴과 똑같은 아기 고라니들이 무척 귀여워 보였다.
아빠 고라니 엄마 고라니 아기고라니가 어울리고 있는 모습은, 사슴 가족과 마찬가지로 가족의 화목함을 느끼기에 충분해 보였다. 가족 단위로 온 관광객들은 고라니를 관찰하며 신기해하면서도, 고라니가 겁이 많은 동물이라는 것을 알았는지 고라니가 보는 앞에서는 행동 하나하나를 세심하게 주의했다.
새애앵-
열차에서 쇠가 맞물리는 작은 소리가 들렸다. 조금 속도를 낼 작정인 것 같았다. 소희가 중얼거리는 듯한 목소리로 나에게 말했다.
“이제 조금만 더 가면 3D 영상관이 있어. 들렸다 가자.”
“3D 영상관? 환타와일드?”
소희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안정된 속도로 무척 천천히 가는데 도대체 겁날게 뭐람? 약간 덜커덩- 하는 열차의 움직임에도 소희는 부르르 떨었다.
예쁘게 이어지는 꽃밭을 따라 얼마쯤 갔을까? 파란색, 빨간색, 초록색, 노란색 물감으로 하얀 도화지 여기저기 콕콕 찍은 듯한 깔끔한 외관의 아름다운 건물 하나가 정거장과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바로 3D 영상관이었다.
“소희야, 다 왔어!”
“응? 응….”
열차가 잠깐 멈춘 사이, 나와 소희는 폴짝 자리에서 내려 건물 앞에 다가섰다. 투명한 유리문 위로 화려하지도, 경박하지도 않은 단아한 글씨체로 적혀있는 ‘꿈을 이룰 수 있는 영상관’이라는 글자가 나의 마음을 잡아끄는 듯 했다.
보은환타지(7) 2007-02-23 09:07:16
“와아….”
입장소를 지나 들어 온 영상관 안의 스크린은 화면이 모두 꺼져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극장 안은 무척 어두웠지만, 보이지 않는 그 모습 때문에 오히려 더 기대감에
부풀어 설레기만 했다. 소희와 짝을 지어 문 앞에서 잠시 차례를 기다리던 나는,
입장권에 쓰인 번호의 좌석을 찾아 자리를 옮겼다.“‘속리산의 사계[四季]’가 주제야, 재밌겠다.”
나는 눈을 빛내고 있는 소희의 말에 수긍하며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나도 기대 돼.”
보이지 않는 상대가 되어 버린 소희와 대화를 나누고 있으면서 시간은 3분 정도가 지났을 것이라고
느껴졌을 즈음이었다.
화악-
사방에서 갑자기 환한 불빛이 터져 나왔다. 나는 순식간에 시야가 밝아지는
바람에 깜짝 놀라면서 자리에 놓아두었던 입체화면용 안경을 쓰고 스크린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우와.”
그 순간 쏟아져 나오는 것은 숨죽이고 있던 사람들의 작은 탄성.
“영상이다….”
하얗고 커다란 전체 스크린은 말 그대로 화면을 비추는 배경이었다. 그 양 옆으로 비스듬히
놓여 진 두 화면에서 가운데로 모이는 또 다른 입체 영상은, 전체 스크린에서 볼 수 있는
입체 영상과 겹치는 환상적인 조화를 이루어 말 그대로
하나의 완벽한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너무나도 신기했던 나는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가도, 곧 정신을 차리고 스크린이
우리에게 보여주려는 내용에 집중하려 했다.
[속리산의 사계, 일 년 열두 달 동안 새로이 펼쳐지는 매력. 화려함과 소박함이 함께 공존하는 그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드립니다.]
이 곳 저 곳 배치 된 커다란 스피커 안에서 낭랑한 내레이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는 정신을 차리고 그 목소리만을 들으려고 귀를 쫑긋 세웠다.
[속리산의 춘삼월─ ‘경칩(驚蟄)’]
말끝을 길게 늘어뜨리는 내레이션의 말을 뒤로, 환상적인 입체 영상이 펼쳐졌다.
“말티고개?”
화면은 선홍빛을 띄는 아름다운 벚꽃이 휘날리는 장면부터 비춰주었다. 흐드러지게
떨어지고 있는 벚꽃은 내가 그 광경을 정말 보고 있는 것처럼, 현실감 있게 입체화가 되었다.
“화아….”
나는 금새 몽롱해진 기분으로 내 앞에 다가 온 벚꽃 하나를 만져 보려 했다. 하지만
부드러운 잎의 표면이 닿는 감촉 같은 것은 느껴지지 않았다. 나처럼 몽롱한 표정으로
손을 뻗고 있는 사람들도 많다는 걸, 나는 그제야 알 수 있었다.
화면은 벚꽃 장면을 전체적으로 잡아나가기 시작했다. …아, 굽이굽이 오르는 말티고개
사이로 온통 분홍빛의 물결이 넘실거리는 모습이란….
‘고작 한 달이 지났을 뿐인데….’
속리산은 쉬지 않고 매력이 바뀌는 곳. 그렇게 설명을 시작한 내레이션과, 매년
속리산을 찾는 많은 사람들의 마음 이 그 한 장면으로 인해 이해가 가는 순간이었다.
[춘 사월, 절기 ‘청명(淸明)’에 접어듭니다. 청명은 지금 여러분이 여행하시면서 정취를 느낄 수 있는 절기입니다.
그렇다면 다음. 오월, ‘입하(立夏)’.]
[…까르르.]
내레이션의 다음 설명이 끝나자마자, 귀여운 웃음소리가 귓가를 간질였다.
솨아아―
맑은 물이 청아한 소리를 내며 계곡을 타고 흐르는 모습이 눈앞으로 다가왔다. 손을 내밀면 정말 내 손끝으로 방울져 올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계곡을 타고 온 맑은 물은 졸졸졸 흐르는 시냇물에 흘러들었고, 파란 하늘에 떠 오른 태양의 햇살을 받아 반짝반짝 빛나는 유리알처럼, 신비로움은 다시금 작은 탄성을 터져 나오게 만들었다.
<다음호 계속>
보은환타지(8) 2007-03-02 08:31:48
영상관 화면 속의 봄은 지났다.
봄처럼 따뜻했던 느낌은 사라지고 기온은 상승하기 마련이지만, 본격적인 여름에 들어서서 시작되는 속리산의 퍼레이드는 생각만 해도 땀이 나는 더위조차 잊을 만큼이나 멋졌다. 무엇보다도 퍼레이드가 벌어지는 사람들 중심 속에서 버티고 있는 속리산의 메인 마스코트가 눈길을 끈다.
정이품송 머리의 도깨비는 깜찍한 캐릭터화가 되어 대형 헬륨풍선 위에 그려졌다. 마스코트들이 푸른 하늘을 덮고 있는 모습은 과연 장관이었다. 하늘을 덮고 있는 천막이 머리에 곧 닿을 것처럼만 느껴져 나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
탕-
북을 치는 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귀를 쟁쟁하게 울리는 소리 때문에 괜히 신이 날 정도였다. 마스코트가 즐비하게 떠오른 하늘을 비추고 있던 화면은 곧 땅으로 옮겨졌다.
“와….”
나는 두 손을 하나로 모으고 입을 가렸다. 삼(三) 화면에서 하나로 모아지는 입체영상에서 느껴지는 생동감과 현실감 때문에 기가 막힐 정도였다.
탕탕탕탕-
경쾌한 북소리가 영상관 안에 울려 퍼졌다. 도깨비뿔이 달린 귀여운 모자를 쓰고 큰 수레위의 올려져 있는 두개의 북을 두드리고 있는 사람들이 나오기에 깜짝 놀랐다.
퐁퐁퐁퐁-
이번엔 가느다란 물줄기를 뿜어내는 소리다. 화려한 무늬가 새겨진 짧은 삼치마를 입고, 고운 저고리를 두른 언니들이 빙그르르 돌며 북 앞으로 앞서가고 있다. 머리 정수리 부분에 끈을 달고 얼굴에 매단 막대기가 뭔가 했더니, 물이 뿜어져 나오는 봉이다. 한 번 휙 하고 돌때마다 햇살 아래에서 잘게 부서지는 물방울들은 땀에 젖은 사람들의 얼굴을 시원하게 적셔주었다.
눈을 즐겁게 하기 충분할 정도의 화려한 부채춤을 추는 사람이나, 사자춤을 추며 따라가는 사람들 등을 감질나게 보여준 화면의 시각은 서서히 넓어지며 퍼레이드의 전체적인 모습을 담기 시작했다. 까마득할 정도로 멀어져서야 겨우 다 담을 수 있을 정도로, 퍼레이드의 줄은 길기도 길었다.
그 퍼레이드가 열리고 있는 장소는 속리산 안에서도 명소로 손꼽히는 유토피아 꽃길이었다. 아주 넓은 꽃길과 꽃들이 사시사철 아름다운 것으로 가장 예쁘게 꾸며져 있는 곳이다. 멋진 퍼레이드와 어우러진 흐드러지는 꽃잎들이 정말 예뻤다. 이윽고 점차 화면이 어두워 지면서 스피커에서 익숙한 나레이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곧 이어 속리산의 단풍 축제입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1. 전등이 켜져 주위가 밝아졌다. 잠시 준비중인 것 같았다. 그 사이 나레이션 목소리가 설명을 덧붙였다.
[먼저, 판타지 월드의 버섯마을이 맞는 가을입니다]
“무슨 소리야?”
‘판타지 세계’라는 개념은 아는데, 버섯 마을이라니? 당최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소희야, 버섯 마을이란게 뭔데?”
“아, 속리산안에 자리 잡은 컨셉형 마을이야. 최근에 만든 곳도 있어서 잘 모를수도 있겠구나.”
컨셉형 마을?
“그게 뭔데?”
“으음, 그러니까…. 너, 속리산 안에 왜 놀이동산처럼 완전이 꾸며져 있다는 거 들은 적 있지?”
“응, 그거랑 관련이 있어?”
“둘 다 어린이들을 위해 준비된 놀이동산 같은 거야. 그런 것을 통틀어서 그냥 판타지 월드라고 하는거지 뭐.버섯마을은 특히 가을이 되면 단풍이랑 어울려서 진짜 예쁘지. 버섯마을 말고도, 아주 많을 거야.”
아하, 그런 거구나…. 듣고 보니, 속리산 안에는 어린이와 어른이 즐길 수 있는 공간이 아주 많다고 소개 된 CF의 내용이 생각나는 것 같기도 했다. 거의 속리산 중심가에 밀집되어 있어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사람도 많아져 훨씬 더 신이 날 것이다.
이것저것 말을 나누고 있는 사이였다. 벌써 준비가 다 된 것 인지 주위가 어두워지고 화면에 영상이 떠오르고 있었다.
보은환타지(9) 2007-03-09 09:35:57
[속리산의 단풍 축제입니다.]
화면은 갑자기 빨간 주홍색으로 물들어 버렸다.
* * *
“후우, 재미 있었어!”
나는 그 후에 이어진 단풍축제와 속리산에서 벌어지는 겨울 눈사람 이벤트를 영상관 안에서 모두 보고 나왔다. 사람들이 모두 청룡열차에 앉자, 여기저기서 떠드는 소리가 봇물 터지듯 터져 나왔다.
“봄 풍경이나, 여름 퍼레이드나, 가을 단풍 축제나, 겨울 눈사람 이벤트나…. 전부 다 짧게 나와서 너무 아쉬웠던거 있지?”
“맞아, 그거 보려면 달마다 한번씩은 꼭 와야 할 것 같아.”
영상관이 보여준 영상의 힘은 대단해 보였다. 아직 속리산 보지도 않은 사람들에게 이렇게 설레는 마음을 들게 할 수 있다는 것이...
영상 관람시간이 끝났다. 하얀 벽돌 여기저기에 색색의 물감이 칠해진 모습이 왠지 더 깔끔해 보이는 건물 안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물밀 듯이 쏟아져 나왔다. 사람들이 한꺼번에 움직이는 모습이 정말 파도가 밀려오는 듯 했다.
열차를 타고 온 사람들은 모두 자리를 채웠다. 여기저기서 떠드는 소리가 봇물 터지듯이 터져 나왔다. 나와 소희도 그랬다.
정말 대 만족이었다. 영상관 안에서 보았던 속리산이 맞는 가을에 열리는 테마 광장 축제부터 겨울의 대형 눈사람 만들기 이벤트까지, 속리산의 계절마다 열리는 이벤트들의 일부분만 보고 왔는데도 사월을 맞은 속리산의 모습이 왠지 새롭게 느껴졌다. 기분 탓일까?
“그래도 시간관계상이라는 이유로 가을이랑 겨울 이벤트 내용을 거의 다 잘라서 보여준 건 너무했어. 안 그래?”
“그건 그래.”
“그리고, 왜 테마마을은 버섯마을만 보여준거야?”
가을을 맞은 버섯마을은 소희의 정말 감질나게 보여준 것 같다. 단풍잎이 지붕 위로 예쁘게 쌓인 버섯 집을 보는 게 정말 재미있고 신기하긴 했지만, 너무 짧다는 점이 아쉬웠다. 가을 이벤트도 그랬지만, 겨울 이벤트가 마음에 들었던 나는 겨울 때도 꼭 속리산에 오리라 마음먹었다.
그렇지만, 소희는 역시 테마마을이 좋았나보다. 영상관을 나오고 나서부터 계속 그 얘기만 하고 있다.
“버섯집 벽도 분명 섬유질로 만든 걸 꺼야. 진짜 말랑말랑하고 부드러워 보였어.”
“소희야, 그 버섯집. 가을에만 갈 수 있는 거야?”
“응? 아닌데?”
신나게 말하기 시작하던 소희는 내 질문에 약간 어물거리며 대답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소희의 대답에 눈을 반짝 빛냈다.
“그럼 지금도 갈 수 있어?”
“응, 그거야 당연하지.”
“우와, 정말? 그러면….”
으앗, 열차가 출발하려는지 덜커덩거렸다. 짐작컨대, 분명 약간의 무서움을 주기 위해서 일부러 덜컹거리는 것일거다. 움직이기 시작하는 열차 때문에 나는 소희에게 더 물어 볼 겨를도 없이 손잡이를 꽉 붙들어야만 했다.
스르릉-
딱히 경사가 진 곳도 아니었지만, 열차는 꽤 빠른 속도로 달렸다. 와아, 가는 길도 전부다 꽃밭이다, 꽃밭. 나는 작은 탄성을 흘리며 이번엔 사진까지 찍었다.
사락-
얼마쯤 갔을까, 앞에서 언뜻 초록색의 물결이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속리산의 잔디구장이 가까워졌으므로….]
열차 스피커에서 안내원 언니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동시에, 열차는 마치 뱀처럼 부드러운 움직임으로 전진해 나아갔다. 왠지 모르게 속도가 훨씬 더 빨라진 것 같다.
스르륵-
[제 2정거장입니다.]
열차가 울타리가 나 있는 길에서 우뚝 멈춰 섰다.
“왓, 도착했다!”
“빨리 내리자!”
나는 사람들의 틈에서 이리저리 밀치기도 하며 힘겹게 내렸다. 뒤이어 내린 소희가 내 손을 잡았다. 울타리 안으로 들어가려던 찰나, 소희가 어딘가를 가리켰다.
“봐, 잔디구장이야!”
나는 소희의 말에 내가 서 있는 자리에서 조금 더 멀리 내다보았다. 상록수에 둘러싸인 커다란 잔디구장이 여기서도 똑똑히 보였다!
“빨리 가자!”
보은환타지(10) 2007-03-16 08:15:24
“사람 진짜 많다.”
“응, 정말….”
사람들이 워낙에 붐비는 통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이리저리 밀치는 사람들 때문에 소희와 손을 꼭 붙들고 있는 것이 힘에 부칠 정도였다. 아, 물론 사람이 지나다니는 잔디공원의 돌길에 서 있는 우리가 잘못이었긴 해도, 못 박힌 듯 붙어버린 발은 도무지 떨어지지가 않는다.
“나 이렇게 넓을 줄은 상상도 못했어!”
울타리 너머에 있는 잔디공원을 바라보며 뻣뻣하게 굳어있던 소희가 소란스럽게 꺼낸 첫마디였다. 나는 소희의 말에 수긍하며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잔디밭은 두 종류가 있었다. 물론, 아주 큰 기준으로 나누었을 때의 얘기다. 잔디의 길이가 긴 공원과 짧은 경기장이 바로 그것이다. 내 눈앞에 있는 잔디는 아주 짧았고, 축구 경기장이었다. 조금 엷은 연두색 잔디와 초록색 잔디가 교차되어 줄무늬를 만들어냈는데, 멀리서 보면 눈이 즐거울 정도로 예쁘다.
“이제 비키자.”
“응? 응.”
정말 축구 경기를 시작할 것 같다. 아까부터 울타리 앞으로 사람이 붐비고 있다. 나와 소희는 그 틈을 어렵게 파고나와, 돌길 오른쪽으로 빠졌다. 목이 말랐는지, 텅 비어버린 물병을 아쉬운 듯이 흔들고 있던 소희가 나에게 말했다.
“야, 아이스크림 먹자.”
“아이스크림 가게가 있어?”
“저기, 통나무집.”
소희가 손가락 가리킨 아이스크림 집은 바퀴가 달린 움직이는 통나무집이었다. 색색으로 칠해진 게 마치 헨젤과 그레텔 동화에 나오는 과자 집 같기도 한 예쁜 가게다. 소희는 메론 맛과 바닐라 맛을 사오겠다며 아이스크림 가게 쪽으로 뛰어갔다.
“헤헤….”
나는 소희의 뒷모습이 사람들 사이에 가려져서 사라졌을 때 즈음 벤치에 자리를 잡았다. 여기저기 싱그러운 초록색뿐이어서 그런가. 마음이 편안해지는 느낌이다. 나는 이 잔디공원을 한번 더 차근차근 둘러보기로 했다. 예전의 논밭을 가꿔서 이렇게 만들었다고 하면 믿어지지 않을 정도의 예쁜 잔디밭이다.
잔디가 짧은 곳은 운동을 즐길 수 있는 곳이다. 넘어져도 아프지 않고, 파묻힐 정도로 잔디가 길지 않아서 운동을 즐기기엔 안성맞춤이다. 공을 가지고 운동을 즐기시는 할아버지 할머니나, 뛰고, 기계체조를 하고, 스트레칭을 하는 언니 오빠들…. 정말 다양한 연령층이 모여 있는 것이 구경거리다.
생각해보자. 넓은 들판이 텅 비어있는 모습도 그 한적함 나름대로 매력이 있겠지만, 그 곳에 생동감 넘치는 사람들이 가득 차 있는 모습을!
“사진 찍어 둬야지.”
나는 어김없이 사진기를 꺼내서 사진을 두 세장 찍어두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잔디가 길게 자라있는 곳을 둘러보기로 했다.
피크닉 온 사람들 같다. 돗자리를 펴놓고 점심을 먹는 가족 단위 관광객들의 모습이 한없이 정겨워보였다.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니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흐음…?”
가족 단위의 관광객들이 모여 있는 잔디공원에서 고개를 돌리다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초록색 잔디 위에 얼음같이 반짝이는 커다란 유리판 같은 것을 말이다. 저게 뭐지?
“안보이잖아?”
벤치에서 일어서서 깡총 뛰어보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언뜻 보았을 땐 얼음판 같았지만…. 벌써 날이 풀리고도 남은 4월이다. 얼음이 얼어있을 리가 없다.
그때였다.
“야아, 아이스크림 사왔어~!”
멀리서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먹음직스럽고 커다란 아이스크림 양손에 든 소희가 이쪽으로 힘겹게 뛰어 오고 있었던 것이다. 소희가 왼쪽손에 들고 있는 초록색 시럽은 분명 내 것, 메론 맛 아이스크림일 거다. 내 앞까지 다가와서 급하게 숨을 몰아쉬던 소희가 입을 열었다.
“헥헥, 뭐하고 있었어?”
“응? 그냥, 구경하고 있었어.”
나는 내가 발견한 얼음판 같은 곳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소희가 아이스크림 하나를 내게 건네고, 자자기 것은 열심히 핥으면서 고개를 쭉 뺐다.
“…얼음판 같은데?”
“4월에 얼음이 얼었을 리가 없잖아!”
“맞아. 이상하다?”
호기심이 솟는다. 소희도 마찬가지일 거다. 눈을 반짝 빛낸 소희와 나는 거의 동시에 서로를 바라보며 외쳤다.
“가보자!”
보은환타지(11) 2007-03-23 19:33:34
아까 시작된 듯싶었던 관광객들의 축구경기는 그 열기가 점점 후끈하게 달아올라 응원하는 사람들의 수가 진짜 경기의 관람객 수를 방불케 했고, 그 외에도 각종 스포츠 운동이 벌어지는 운동장이나 이곳저곳을 구경하기에 안성맞춤인 가로등 길은 어디든지 북적이는 사람들로 넘쳐났다. 거기엔 떨어진 음식쓰레기를 줍느라 분주하게 움직이는 환경미화원 아저씨들도 물론 더해졌다.
“앗, 죄송합니다.”
…그래서 길을 헤치며 원하는 곳으로 향하려고 할 때, 사람들과 너무 자주 부딪힌다. 이것만으로도 다섯 번째, 또 다시 어깨를 부딪친 사람에게 미안하다고 몇 번이고 말하는 소희와 나였다.
“우리 그냥 가자, 너무 힘들어~!”
더 가지 못하고 벤치에 털썩 주저앉아 버린 나는 소희에게 투정을 부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소희는 못들은 척 하면서, 아까 청룡열차에서 나눠주었던 팸플릿을 꺼내들고 눈을 이리저리 굴리기만 했다. 몇 분 후, 드디어 원하던 것을 팜플릿 안에서 찾았는지, 팸플릿만 빤히 바라보고 있던 소희의 얼굴이 환하게 펴졌다.
“아, 여깄다.”
“응? 어디 어디?”
소희는 검지를 척 치켜세우고 정방 향을 가리키며 밝게 웃었다. 3개의 길로 갈라지는 곳이었다. 그 중 한 길은 계단을 올라가는 길이다.
“이제 조금만 더 가면 돼! 바로 앞에 있어.”
“저기 계단? 저기 계단만 올라가면 돼?”
“응! 그럼 바로 보일거래.”
우리는 저 먼 곳에서 보았던 얼음처럼 반짝 반짝 빛나는 잔디공원을 찾고 있는 중이었다. 지리를 확인했어야 하는 건데, 금방 찾을 수 있을 줄 알고 무작정 걸어와서 헤매고 있었다.
“자, 그럼 가자.”
“응!”
어느새 힘이 솟아나 벌떡 일어난 나는 소희가 이끄는 대로 따라갔다. 낮은 계단위로 올라가 내려다 본 공원에는 여전히 사람이 붐빈다. 굽어지는 길, 꺾어지는 길 마다 우아한 가로등이 솟아올라 있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아이스크림 차나 과자 집은 유난히 강한 인상을 남긴다. 그것 때문에 동화책 안에서 묘사되는 풍경 모습과 여기 잔디공원이 똑 맞아 떨어지는 듯싶었기 때문이었다.
“뭐해? 빨리 가자.”
“응? 응.”
나는 곧장 걸음을 옮겼다. 조각조각 나뉘어 있는 돌이 맞추어져 길을 만들고 있었는데, 그것이 마치 여느 마을의 광장처럼 넓어졌다.
그리고, 갈색 빛깔의 바닥과 색이 대비되는 흰 울타리도 보였다. 울타리는 우리가 멀리서 보았던 넓은 얼음판을 둘러싸고 있었다.
“사월에 얼음이 얼었을 리가 없는데….”
나는 얼음 위를 씽씽 달리고 있는 사람들을 보며 멍하게 변해버린 얼굴을 굳혔다. 그리고 호기심에 휩싸였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날씨가 따뜻해지고 있는데 녹지도 않는다. 저게 과연 진짜 얼음일까?
“저기 봐!”
소희가 스케이트장으로 들어가는 문길에 세워져 있는 표지판을 가리켰다. 거기에 적혀있는 짧은 문구를 나는 뚫어져라 바라보며 또박또박 읽어갔다.
“속리산 명물. 신기한 얼음판, ‘아이스 필름’ 스케이트장.”
“어, 저기 대여점도 있다.”
소희는 사람들이 몰려드는 작은 통나무 가게를 가리켰다. 가게 옆에 세워져 있는 커다란 안내판이나, 돌아서는 사람들의 손에 쥐여져 있는 스케이트를 보아 분명 대여점이었다. 그 글씨가 멀리서도 확연히 보였다.
“신기하다. 나 타보고 싶어!”
“너 스케이트 탈 줄 알아?”
“뭐 어때, 롤러스케이트나 인라인은 타본 적 있으니까 괜찮겠지.”
“그치만 저거 비쌀 것 같은데….”
“한번 가보자니까?”
소희는 나를 막무가내로 끌고 갔다. 그렇지만 나는 끌려가는 내내 울상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혹시라도 빌리는 값이 생각보다 더 비싸면, 소희는 분명 나에게 돈을 내라고 할 것이다. 아까 아이스크림 사준 것을 이유로 들어가며 말이다.
<다음호 계속>
보은환타지(12) 2007-03-29 19:21:17
“이래가지곤 도저히 못 빌리겠네. 줄이 왜 이렇게 길지?”
“그럼 그냥 가자.”
“아니야. 이왕 기다리기로 한 거 기다리자고.”
작은 통나무집 하나에 뱀처럼 늘어서 있는 줄을 멀리서 본다면 분명 신기할 테다. 그러나 바라보는 사람들은 알까. 줄을 이루고 있는 사람들 한명 한명은 얼마나 답답한지.
“히잉, 다리 아파!”
“너 또 징징거릴래? 그럴 거면 그냥 가자니까?”
“아니야, 그냥 다리 아파서 그런 거야.”
스케이트를 빌리기 위해 5분 정도 기다렸다. 정작 돈을 내야하는 나는 잠자코 있는데, 소희가 다리가 아프다면서 땅바닥에 냅다 주저앉아버리는 게 벌써 다섯 번째다. 그러면서도 스케이트를 포기하자고 하면 곧잘 일어선다. 하지만 일어서 놓고도 투정은 여전하다. 나는 그 우는 소리가 싫어서, 소희를 계속 달래주어야만 했다.
“소희야, 그래도 아르바이트 선 언니가 일 처리 능력이 좋은가보다. 줄이 빨리 줄어들고 있잖아? 몇 차례 밖에 안 남았다니까?”
“그런가…. 난 잘 모르겠는데.”
“봐, 벌써 우리차례에 가까워졌잖아.”
“5분이나 기다렸는데 벌써는 무슨….”
퉁명스럽게 대답 하고나서 새삼스럽게 통나무집을 넘겨다 본 소희의 얼굴이 그래도 조금은 밝게 펴졌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났다. 우리 앞엔 단 두 차례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자, 여기요. 어린이용 두 개하고 성인용 하나…. 됐죠? 그러면 다음 분!”
줄을 선 사람들이 하나 둘 빠져나갈 때마다 매번 들리곤 했던 아르바이트 언니의 ‘다음 분’이라고 외치는 말소리가 이번엔 크게 들렸다. 아닌 게 아니라, 벌써 우리차례가 다가왔던 것이다. 하지만 난 그 와중에도 돈을 누가 내느냐에 대해 소희와 말다툼을 하고 있던 터라 미처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 때문에 언니는 스케이트를 정리하는 와중에도 바삐 재촉을 해야 했다.
“다음 분 어떤 걸 드릴….”
“……!”
나는 아르바이트생 언니가 두 번째 부름을 했을 때에야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막상 마주친 언니의 얼굴이 왠지 낯이 익다는 사실을 안 나는 깜짝 놀랐다.
동글동글한 눈에 오똑한 코, 얇은 입술과 잡티 없는 하얀 피부 때문에 무척 예쁘장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짧게 친 샤기컷 머리 때문에 조금 낯설어 보이긴 하지만 이 언니는 분명….
“효진이 언니?”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 집 바로 옆집에 살았던 효진이 언니였다. 가까운 이웃 사이었던 효진이 언니와 나는 무척 친했다. 효진이 언니는 외동딸이었던지라, 나이차가 많이 나는 나를 귀여워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한 두 달 전쯤이었던가? 언니와 나는 어느 날 갑자기 헤어졌는데, 그건 고등학생이었던 언니가 한방대학에 진학했기 때문이었다. 눈물을 글썽이면서 앞으로는 자주 못 볼 거라고 말하던 모습이 지금까지도 눈에 선하다. 그런데 이렇게 얼마 지나지도 않아서 만나게 되다니!
“어, 희주야!”
효진이 언니도 나를 알아본 것 같았다. 언니의 얼굴에 반가움으로 인한 함박웃음이 걸렸다. 하지만 우리 차례에서 시간이 지체되어 뒤쪽에서 터져 나오는 불평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효진이 언니는 웃으면서도 무척 안타까워했다.
“희주야. 언니가 조금 있다가 교대하니까, 이거 신고 기다리고 있어!”
언니는 돈도 받지 않고 나와 소희에게 스케이트를 주었다. 깜짝 놀란 소희와 나는 얼른 돈을 꺼냈지만, 이미 다음 사람이 스케이트를 빌리려 하고 있어서 선뜻 내밀지는 못했다.
효진이 언니는 눈을 찡긋하면서 얼른 가라는 손짓을 하고 있었다.
* * *
“언니!”
“어어, 희주야!”
나는 멀리서 뛰어오는 효진이 언니를 보고 손을 크게 흔들었고, 내 옆에 있던 소희도 똑같이 따라했다. 숨이 턱까지 차오를 정도로 열심히 뛰어와서 우리 앞에 다다른 효진이 언니는 숨을 급하게 몰아쉬었다. 내가 내밀어준 물을 한 모금 들이 킨 효진이 언니는 들고 온 커다란 주머니 안에서 우리와 똑같은 색의 성인용 스케이트를 꺼내보였다.
“너희들이랑 같이 타려고 가져왔어.”
“응? 가르쳐 주려는 게 아니라?”
“얘는? 타면서 가르쳐줘야지!”
언니는 그렇게 말하면서 환하게 웃었다. 예나 이제나 다를 것 없이 여전히 어린애 같은 언니의 모습은 참 보기 좋았다. 나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가만히 미소를 짓고 있었는데, 그 순간 한 가지 깜빡한 사실을 떠올리고는 입을 열었다.
보은환타지 (13)
“효진이 언니.”
“응?”
“소개할게, 여긴 내 친한 친구 소희.”
“아, 안녕하세요.”
내가 직접 소개를 시켜주려 하자 당황한 소희는 말까지 더듬었다. 한참 나이 많은 언니와 인사하려해서 그런지 약간 긴장한 것 같았다. 효진이 언니는 그런 소희가 귀여웠나보다. 언니는 친근한 태도로 소희와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며 걸음을 옮겼다.
“소희야, 희주랑은 앞으로도 잘 지내.”
“그럴게요.”
효진이 언니의 편안한 말투가 소희의 얼굴에 어려 있던 긴장된 기색을 조금씩 녹여가는 듯 했다. 소희의 얼굴에도 어느새 자연스러운 미소가 걸렸던 것이다.
“자, 스케이트 신어.”
스케이트장 안에서도 신발을 신을 수 있는 길 중 가장 가장자리로 들어온 효진이 언니가 우리의 스케이트 끈을 일일이 묶어주었다. 조이지도 않고, 헐렁하지도 않게 말이다. 나는 언니가 스케이트를 신겨주는 동안, 줄곧 스케이트장만을 내려다보았다.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것을 보면 정말 얼음 같은데, 녹지 않는 게 정말 신기했다.
“언니 따라해 봐. 하나 둘….”
먼저 일어선 언니가 스케이트장 위에서 부드럽게 한 바퀴를 돌았다. 언니의 동작은 군더더기 하나 없이 무척 깔끔했다. 나는 비틀거리는 몸을 힘겹게 일으켜 세우고, 조금 긴장한 자세로 스케이트장 위에 첫 발을 내딛었다. 소희도 똑같이 행동했다.
“자, 한바퀴 돌….”
또 다시 시험을 보여주려던 언니는 채 반 바퀴도 돌지 않은 채 그 자리에 그대로 멈춰 서야만 했다. 의외로, 정말 의외로 소희와 나는 스케이트에 쉽게 적응을 했던 것이다.
“어머, 너희들 학교에서 스케이트 같은 것도 가르치는거야?”
“아아니, 그런 건 아닌데….”
나는 아까 효진이 언니가 했던 것처럼 한발로만 스케이트장을 주욱 돌아보았다. 사람은 많았는데 제대로 타고 있는 사람은 몇 되지 않아서, 나 역시 꽤나 마음에 들어서 타 보았던 스케이트가 주목을 받았다.
“아아, 그러고보니 이거랑 비슷한거….”
역시, 나와 마찬가지로 원만하게 스케이트를 타고 있던 소희가 뭔가 생각났다는 듯 손바닥을 탁치며 외쳤다. 덕분에 얼마나 허무했는지 약간은 멍한 표정이던 효진이언니가 정신을 차렸다.
“보은에서 인라인, 인라인이 유명하잖아. 그래서 특별활동 시간에 인라인을 타.”
“인라인…? 아, 오륜 롤러브레이드를 말하는거구나!”
“그거나 그거나, 어쨌든. 발 밟는게 인라인이랑 비슷해, 그래서 편한 것 같아.”
“그래? 정말 잘됐다!”
효진이 언니의 멍하던 얼굴에 진심으로 기뻐하는 듯한 기색이 서렸다. 스케이트를 탄 채 우리들을 데리고 어디라도 가고 싶었던 것일까? 아니나 다를까, 예상 밖으로 스케이트를 잘타는 우리를 보자 마음이 더 급해졌는지 효진이 언니가 소희와 나의 손을 다 세게 당겼다.
“자, 이쪽에서 보면 정말 멋있는게 있어.”
“그게 뭔데.”
“자, 직접 봐!”
“……!”
“멋있지, 멋있지?”
효진이 언니는 꼭 대답을 듣고 싶은지, 내 주위에서 계속 물어대기만 했다. 귀찮지도 않았나보다.
솔직히, 나 같은 경우는 너무 놀라워서 입도 열지 못했다.
‘병풍….’
옛날 할아버지들이 정말 화선지 안에 붓글씨도 쓰고, 매일 매일 그리던 멋드러진 산의 모습과 똑같은 것이 눈앞에 바로 보였다. 정말 병풍 같이 펼쳐진 산이 너무나도 멋있었던 것이다!
“우와, 저기가 문장대야?”
“응, 여기서 보니까 정말 색다르지?”
나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 시선은 효진이 언니의 손끝을 따라 그대로 움직여갔다. 효진의 언니의 손끝은 하얗고 깔끔한 벽돌쌓기 건물에서 움직임을 멈추었다.
보은환타지(14) 2007-04-13 09:21:34
“저기가 어디야?”
“응? 아…….”
효진이 언니는 대답을 하는 것을 잠깐 망설여하더니, 우리 발에 신겨진 스케이트를 슬쩍 내려다보았다. 그리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나는, 너희들이 스케이트 타는 법을 몰랐으면 스케이트장을 돌면서 천천히 가르쳐 주려고 했는데….”
“그런데?”
“너랑 소희 둘 다 스케이트도 잘 타고 하니까, 꽃밭부터 일찍 둘러보고 점심을 먹는 건…. 어때?”
“꽃밭? 자전거?”
내가 고개를 갸웃하자, 효진이 언니는 친절하게 설명해주었다.
“저 하얀 건물이 자전거를 빌려주는 곳이야.”
“자전거? 자전거라면 나도 있는데….”
“바보, 그래도 지금은 없잖아.”
“그냥 자전거가 아닌데…. 얘들아, 잠깐 조용히 해봐.”
효진이 언니가 우리 둘 사이의 말장난을 재빨리 가로막았다.
“너희들이 보통 타고 다니는 그 자전거가 아니라, 4인용도 있고, 5인용도 있는 자전거야. 음, 어떻게 설명한다…. 역시 직접 보는 게 제일 낫겠는데.”
“보통 자전거가 아냐? 언니가 그렇게 말하니까 궁금하다.”
“음, 난 별로….”
소희는 영 시큰둥한 표정이었다. 모르긴 몰라도, 스케이트를 더 타고 싶은 마음 때문에 그러는 것 같았다. 티는 안냈지만, 얼음이 아닌 스케이트 장 바닥에도 호기심을 느끼는 듯 했고 말이다. 효진이 언니는 더 답답해했다.
“한 번 보면 정말 타고 싶어 할 텐데, 어쩌지?”
“음….”
나 역시 지금 당장 스케이트를 벗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런 미련은 언니가 말하는 ‘자전거’에 대한 호기심에 미치지는 못했다. 그리고 꽃밭이라…. 미처 보지 못했던 장소인 것 같았다. 나는 기꺼이 스케이트를 벗고, 스케이트장 안에 있는 커다란 신발장 구석에 넣어두었다. 나는 소희를 돌아보았다.
“그럼 나랑 효진이 언니가 빌리러 갔다가 이쪽으로 끌고 올 테니까, 그 때 같이 맞은편으로 건너자.”
“하지만 나 혼자 타기가 그렇단 말이야.”
또 다시 투정을 부릴 기세가 느껴지는 바람에, 나는 슬쩍 효진이 언니의 뒤로 숨었다. 효진이 언니는 조금 난처한 표정으로 소희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소희야, 언니가 서두르는 데에도 이유가 있어. 스케이트는 속리산을 돌아보면서 한 번 더 타겠다고 약속할게. 소희도 같이 가자.”
“그렇지만…. 그 자전거는 정말 내가 상상하는 보통 자전거는 아니지?”
“당연하지, 언니가 거짓말 할 이유는 없잖아.”
효진이 언니는 그렇게 말하면서 방긋 웃었다. 소희는 효진이 언니의 따뜻한 미소를 보고 조금씩 마음이 동하기 시작한 것 같았다. 그렇지만 네 번 정도를 다시 똑같은 방법으로 설득해낸 끝에야, 소희의 입에서 허락을 하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소희는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물었다.
“알았어. 대신 한 번 더 탄다는 약속 잊으면 안 돼.”
“응, 당연하지. 자, 그럼 가는 거지?”
“응, 갈래.”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은 효진이 언니가 그제야 스케이트를 벗었고, 끈을 꽉 조여서 애를 먹고 있던 소희도 도와주었다. 나와 소희, 그리고 효진이 언니는 다정하게 손을 잡고, 조금 멀리 보이는 건물. 아니, 자전거 대여점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 * *
“와아….”
대여점의 외곽은 멀리서 본 것보다 더 세련해보이고 깔끔해서, 가까이 다가가서 본 순간 깜짝 놀랐다. 투명한 문 사이로 얼굴을 바짝 들이대고 놀란 얼굴을 하고 있는 날 이상하다는 듯 바라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자, 문 열자.”
“바보같이…. 빨리 들어가.”
효진이 언니는 앞장 서 있던 내 대신 손을 뻗어 문을 열어주었고, 뒤따라온 소희는 내 어깨를 장난스럽게 툭 치며 핀잔을 준 뒤에 들어갔다. 나는 소희를 뒤따라갔다.
보은환타지(15)
“어서오세요.”
안내 데스크톱에 서서 손님 맞을 준비를 하고 있던 깔끔한 정장차림의 언니가 우리를 향해 상냥히 미소지어주었다. 기대했던 것 보다는 아담한 내부의 모습에 내심 당황하여 이리저리를 기웃거리고 있던 나는 기대 반 호기심 반으로 그 언니를 향해 다가갔다. 효진이언니와 소희가 혼자 걸어가 버린 나를 뒤따랐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가까이서 보니 더 어려보이는 언니다. 조금 짙은 화장 때문에 잘 안보였는데, 얼굴이 무척 앳되어 보였다. 그래도 대학생쯤? 효진이 언니와 나이가 비슷할 것 같았다. 조금 신기해진 내가 대답도 잊은 채 그 언니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고 있는데, 어느새 내 뒤로 다가온 소희가 나를 툭 건드렸다.
“야, 너 뭐해? 처음 보는 분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고 있고……. 그거 실례야.”
“응? 아…….”
그제서야 조금 의아하다는 기색을 담은 얼굴을 눈치 챈 나는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거둬들였다. 소희는 여전히 나를 이상하다는 듯이 쳐다보고 있었다. 소희보다도 더 늦게 다가온 효진이 언니가 캔 음료수 3개를 손에 들고 종종 잰 걸음으로 내게 다가온 게 바로 그때였다. 효진이 언니는 사람 좋게 웃으며 음료수 하나하나를 우리 손에 쥐어주었다.
데스크 톱의 언니는 안내문을 나눠줄 생각이었던지, 종이 뭉치를 뒤적이며 우리에게 다시 물었다.
“일행이신가요?”
“네, 그런데요….”
정장을 입은 언니의 얼굴을 아주 잠깐 마주했던 효진이 언니의 얼굴이 미간이 좁아졌다.
“혜선이?”
“……?”
정말 그게 이름이었는지, 다시 고개를 든 그 언니는 상당히 얼떨떨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언니는 조금 의아한 얼굴로 효진이 언니의 얼굴을 다시 한번 천천히 뜯어보는 것 같았다.
“……!”
이윽고, 그 언니의 두 눈은 잘 보이지 않았던 원래의 앳된 얼굴이 다 드러날 정도로 동그랗게 떠졌다.
“김효진?”
* * *
벌써 10분이 지났다.
“정말 신기해…. 6학년때 단짝이었는데, 어떻게 여기서 만나지?”
“바보, 7년밖에 안 지났어.”
효진이 언니와 혜선이 언니는 우리들을 놔두고 계속해서 언니들만의 소소한 잡담을 즐겼다. 워낙 즐거워보였던 터라 낄 틈이 없어 말을 걸지 않았던 나는 이번엔 용기를 냈다.
“효진이언니.”
“응, 그때 네가 그랬….”
“…효진이언니!”
언니의 이름을 두 번 부르고나서야 관심을 끌 수 있었던 나는 언니가 보는 앞에서 알듯 모를 듯 뾰루퉁한 표정을 지었다. 효진이 언니는 조금 난감하다는 표정이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 있었다는 것을 잠깐 동안 잊고 있기라도 했다는 듯한 저 얼굴은 뭐지? 정말 주위 사람들도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던 건가?
“미안해, 얼떨결에 기다리게 했네….”
효진이 언니는 정말 미안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것은 혜선이 언니 역시 마찬가지였고, 졸지에 내가 더 미안해해야만 하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아니, 그렇게 까지 미안해하면 내가 더….”
결국, 소희가 나섰다. 소희는 우물쭈물하고 있는 나를 대신해서 이렇게 말해주었다.
“자전거를 빌리러 왔는데…. 혜선이언니, 자전거는 어디있어요?”
“아, 그건….”
혜선이 언니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효진이의 언니의 친한 친구였다는 사실때문인지, 그 미소가 아까보다도 더 친근감 있게 느껴졌다.
“자, 따라와.”
혜선이 언니는 우리를 이끌고, 앉아있던 휴게실을 벗어나 다시 데스크 톱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데스크톱 옆엔 아주 새하얗고 커다란 문이 있었다. 미처 발견하지 못했는데….
“엘레베이터야. 사실, 자전거가 도난당하기 쉬워서 자전거를 보관하는 곳은 관계자 외 출입금지구역 이거든.”
언뜻 보면 그냥 평범한 문처럼 생긴 엘리베이터를 연 혜선이 언니는 나와 소희, 그리고 효진이 언니를 그 안으로 들여보내주었다. 그리고 도착을 알리는 ‘띵’ 소리가 울릴 때까지, 친절한 설명을 아끼지 않았다.
“보면 깜짝 놀랄 꺼야. 자전거의 종류가 상상할 수도 없이 너무 많아서….”
“정말? 그정도로?”
나는 어느새 자연스레 말을 놓게 되었지만, 혜선이언니는 개의치 않은 것 같았다. 오히려 편안하게 대화를 나누는 것이 혜선이언니 편에선 더욱 즐거운 것 같았다.
내리고자 했던 곳이 가까워진 듯 했다. 내가 생각했던 ‘띵’소리보단 조금더 예쁜 멜로디가 흘러나와 도착을 알려주었다.
보은환타지(16) 2007-04-30 07:54:18
“와…. 철문이라 그런가. 생각보다 묵직하네. 얘들아, 문 여는 것 좀 도와줄래?”
혜선이 언니는 혼자서 문을 열어보는 것이 처음인 것 같았다. 내 주먹만한 크기의 커다란 자물쇠를 풀기위해 한참 동안 쩔쩔매는가 싶더니, 겉보기엔 별로 무거워 보이지 않는 하얀 문의 무게 때문에 한참 고생을 하는 것이다. 나와 소희, 그리고 효진이 언니는 혜선이 언니 부탁에 재빨리 고개를 주억거린 뒤 다 같이 힘을 보태며 힘껏 문을 밀었다.
끼이익-
넷이 합심하자 문은 의외로 쉽게 열렸다. 하지만 점차 벌어져나가는 틈새로 환히 터져 나오는 불빛 때문에 당장 눈을 뜰 수는 없었다.
“후아, 됐다!”
혜선이 언니가 먼저 걸어나가는 것 같았다. 나는 어둠속에 있다가 갑자기 빛을 맞이하자 적응이 되지 않아 실눈만 뜨고 앞을 바라보았다.
“우와….”
나지막한 탄성이 흘러나왔다. 환한 빛 때문에 잘 떠지지 않던 눈이 번쩍 떠질 만큼이나, 건물 안에서 있는 공간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의 화려한 모습이었다.
보통 자전거 크기의 2배는 훌쩍 뛰어넘는 커다란 크기의 자전거가 족히 백 대는 넘어보였다. 그 하나하나의 모습을 살피려고 눈을 옮기는 시간만 해도 상당할 것 같았다.
종류만 해도 수십 가지였다. 단순히 네발 자전거만 생각하고 있던 나로써는 눈이 휘둥그레질 일이었다. 언젠가 티비에서 보았던, 누워서 가는 연인용 자전거도 있고, 마주보면서 페달을 굴릴 수 있는 맞춤형 자전거도 있었다. 의자 두 개, 손잡이 네 개, 그렇지만 한 사람만 움직일 수 있는 자전거도 있다.
그렇지만 역시 눈길을 잡아끄는 것은 내가 처음에 기대했던 자전거다. 하나같이 호화로운 그것들은 정말 중세시대 왕족들이 탈 법한 자전거들만 모아놓은 것 같았다. 유려한 무늬로 휘어져 있는 금테는 손잡이도 되었고, 문기둥도 되었다. 위가 탁 트여 있는 자전거는 보이기만 해도 시원해보였고, 그렇지 않으면 큐빅들로 알록달록하게 꾸며져 있거나 보기만 해도 저절로 탄성이 터져 나오는 수려한 기하학적인 무늬들이 그 위를 장식하고 있었다.
바퀴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반짝반짝 아름답게 빛나면서 진짜 은처럼 보이는 커다란 쇠바퀴는 더욱 기품 있어 보였다. 작았다면 지금보다 우아해보이지는 않았을 거라고 확신했다.
화려한 멋 뒤로 소박한 멋의 자전거도 있었다. 그 것은 효진이 언니가 마음에 들어 했는데, 고급스런 원목의 자재로 몸체부터 바퀴까지 이루어져 커다란 꽃으로 장식되어있었다. 장미, 해바라기, 모란등 크고 화려한 꽃부터 시작해서 제비꽃, 안개꽃, 데이지에 이르는 작은 꽃들은 모두 섬세하기 이를데 없는 수작업으로 만들어진 가짜 꽃이었다.
정말 살아있는 듯 윤기가 흐르는 갈색 나뭇가지에 휘둘려서 자전거 몸체에 빈틈없이 감겨진 모습은 동화속에서나 보던 그림처럼 아름다워 보였다. 바퀴 역시 물론 나무였으나 어찌 된 일인지 딱딱함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바퀴의 삐그덕 거리는 소리조차 정겹게 느껴질 뿐이었다.
어느새 내 곁으로 다가온 혜선이 언니는 눈을 찡긋했다.
“이래 뵈도 특별대우야. 신청서를 내기도 전에 이렇게 둘러보게 해주는 건.”
“아, 감사해요.”
“별 말을. 자, 빨리 둘러보고 마음에 드는 걸 골라봐. 자전거마다 빌리는 가격이 다르거든.”
“예? 상당히 고민되는데….”
정말이다. 하나같이 모습을 보면 마음에 들지 않는 게 없었다. 내가 정말이지 난처한 표정을 짓고 있었는지. 소희가 다가와서 가벼운 충고를 해주었다.
“이왕이면 앞 유리가 큰 걸로 고르자. 구경도 더 쉬울테니까….”
짐짓 다가온 효진이 언니 역시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화려한 장식의 자전거보단 수수한 자전거가 더 마음에 든 듯한 표정이 역력했지만, 세심한 배려로 선택권은 나에게로 넘겨주는 것 같았다.
할 수 없었다. 나는 자전거 내부의 모습까지 살펴서 골라보기로 했다.
페달 굴리기는 쉬운지, 셋이서 타는 자전거라기엔 너무 크지 않은지, 또 기계는 어떤지, 자전거를 움직이기엔 미숙한 사람에게 힘들지는 않을지….
꽤나 꼼꼼하게 따지고 골라보려는 내 의도에 효진이 언니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어주었고, 소희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고르고 고른 끝에 골라낸 자전거는 사인용이었지만, 한 칸을 짐칸으로 쓴다면 무리가 없을 듯 보였다. 또 소희의 말대로 위는 뻥 뚫려 있었지만 앞의 시야 역시 넓은 창문으로 탁 트여있었다. 외부는 순백의 표면에 금테로 깔끔한 장식이 마무리 되어 있어 화려하지도, 그렇다고 너무 수수하지도 않아 마음에 들었다. 기기장치 역시 길을 잘 모를 수 있는 사람들에게 특혜인 전용 네비게이션이 장착되어 있어 실용적이었다.
나는 미소를 띈 얼굴로 혜선이 언니에게 말했다.
“이걸로 할래요.”
“음? 그거?”
가만히 서서 내가 고르는 것을 줄곧 지켜보기만 하던 혜선이 언니가 내 곁으로 다가와서 자전거를 살피기 시작했다. 몇가지 안전장치가 제대로 작동되는지 확인한 혜선이 언니는 뒤로 물러서서 짐짓 대견하다는 듯한 눈초리로 나를 바라보았다.
“눈썰미 좋네. 저거 품질에 비해서 가격도 저렴한 건데.”
“에, 정말요?”
“응, 부담 되진 않을꺼야. 이걸로 결정하는거, 모두 동의?”
소희와 효진이언니는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상당히 만족스러워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잠시만 기다려.”
혜선이 언니는 이어폰을 꺼내 누군가와 연락을 시도했다. 얼마 안 있어, 내가 선택했던 자전거는 스스로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음호 계속>
보은환타지(17) 2007-05-10 15:58:08
“인도는 절대 침입하면 안 돼는 거 알지? 그래도 자전거 전용 길의 안전 범위를 넘으면 경보음이 울리니까 그렇게 크게 걱정하지는 마.”
“응, 알았어. 그런데 내가 네 시간을 너무 뺏은 건 아닌지 모르겠다. 이제 너도 들어가 봐.”
“그래, 들어갈게. 그럼 구경 잘 하고. 조심하는 거 잊지 마…!”
혜선이 언니는 꽃밭으로 향하는 길목에서 자전거를 타려는 효진이 언니와 나, 그리고 소희를 배웅해주었다. 막 자전거를 탄 우리 역시 혜선이 언니를 향해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갈게, 언니!”
“응, 잘 가!”
우리가 인사를 끝마치자, 앞자리에 앉은 효진이 언니는 자신의 발아래에 있는 페달을 조심스럽게 굴렸다. 크기가 커서 굴리기가 조금은 부담스러울 거라고 생각 되었던 자전거는 의외로 부드러운 움직임을 보였다. 혜선이 언니의 서있는 모습이 천천히 멀어져 갔다.
“이정도 속도면 괜찮겠다. 그렇지?”
“응. 적당해.”
우리는 또다시 몸을 힘껏 돌려서 혜선이 언니를 바라보았다. 조금 떨어지긴 했어도 우리를 향해서 방긋이 웃어주고 있는 얼굴만큼은 또렷이 보였다.
“자, 여기만 빠져나가면 된다.”
그렇게 말하는 효진이 언니의 목소리에 나는 다시 한 번 앞을 돌아보았다. 튼튼한 나무기둥에 예쁜 꽃과 줄기가 얼기설기 얽혀 자연의 느낌이 물씬 풍기는, 이제 지나가기만 하면 꽃밭으로 들어설 수 있다는 예쁜 관문이 보였다. 대여점 구간을 빠져나가는 곳이었다. 자전거만 다닐 수 있는 전용구간으로 나와서 그런지 이 넓은 공터에서 사람은 한명도 없었는데, 저 너머에선 와글거리는 소리와 수많은 사람들이 움직임이 한 눈에 다 보였다.
“그럼 갑니다…!”
허리를 푹 숙인 효진이 언니는 조금 뜸을 들였다가 힘차게 페달을 굴렸다. 자전거는 미끄러지듯이 관문을 통과했다.
사람들의 시선이 일순 우리 쪽으로 쏠렸지만, 나는 그런 것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왜 이 곳에 사람이 이렇게나 붐비고, 쉴 새 없이 카메라 플래시가 터져 나오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학교 운동장의 다섯 배는 되는 넓은 공간에 자전거 전용 길에 자전거도 붐볐고, 사람도 붐볐다. 밤이 되면 더 예쁜 빛을 수놓으며 반짝일 것 같은 조경이 가득한 꽃밭이 이 공간을 둘러싸고 있었고, 그 가운데엔 맑은 초록빛이 모두 반사될 것만 같은 연못이 분수대와 함께 자리잡고 있었다. 너무 예쁘고 아름다웠다. 나와 소희가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는 사이, 방향감각이 있는 효진이 언니는 우리의 도움 없이도 자전거 전용도로로 아주 안전하게 진입했다.
꽃이 잔뜩 피어 있는 모습을 구경할 수 있게 되자, 효진이 언니는 페달을 천천히 굴렸다. 자전거에 올라탔기 때문에 시야가 조금 더 넓어진 듯한 만족감에 나는 밝게 웃었다.
어렸을 때의 생각이 난다. 속리산이 이만큼 발전하고, 세심한 부분까지 하나하나 정성을 들여서 이렇게 멋진 관광지로 개발시킬 줄을 몰랐던 때였다. 멋없는 갈대풀만 가득하고, 짙은 풀독 냄새와 듬성듬성 피어있는 꽃들로 꽉 차 있었을 때와 지금을 비교해 본다면, 정말이지 감회가 남다를 수 밖에 없었다.
온통 꽃으로만 가득차 있는 이런 공간은 분명 흔치가 않을 것이다. 예전의 그 모자란 듯했던 풍경에서 탈바꿈한 듯한 아름다운 모습에선 하양색, 분홍색, 빨강색, 파랑색등의 물결이 넘쳐났다.
“팬지, 라넌큘러스, 데이지, 튤립, 히아신스, 프리뮬러, 수선화, 아네모네….”
“그리고 벚꽃도 있어!”
사시사철 꽃의 종류가 조금씩만 바뀌어가는 것만 뺀다면 사계절 모두 속리산 관광지에는 ‘꽃’이 존재했다. 나는 이 모습들을 카메라 안에 소중히 담으면서도, 속리산의 경제가 사시사철 변하는 꽃 산업으로 더욱 활성화 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낸 나는 나름대로 흡족하게 웃었다.
나는 내가 아는 꽃 외에도, 정말 많은 꽃들을 볼 수가 있었다. 그리고….
“와아…!.”
연발할 수 밖에 없는 탄성 역시 잊지 않았다. 정말이지, 조금씩 페달을 굴릴때마다 나오는 새로운 꽃들, 그리고 풍경은 나를 감탄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여기저기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화목하게 자기 가족사진만을 찍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전문 사진작가인 듯한 사람들도 여럿 와서 사람들이 붐벼 활기찬 모습을 보여주는 모습을 찍거나 흐드러지는 꽃밭 사이로 거니는 가족 관광객들을 찍곤 했다.
플래시음은 정말 단 한 번도 끊기지 않고 쉴 새 없이 들려왔다.
“언니, 그리고 소희야. 우리도 사진 찍을까?”
“응? 사진?”
소희는 갑자기 무슨 소리냐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지만, 효진이 언니는 좋은 생각이라면서도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어쩌지? 언니가 디지털 카메라를 놓고 왔는데.”
“나 챙겨온 거 있어. 그러니까 빨리 찍자!”
“응? 그래?”
효진이 언니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전거 내에 있는 빨간색 버튼을 꾹 눌렀다. 정지 버튼이었다. 소희도 마지못해 함께 자전거 밖으로 내렸다.
“자, 한 명 한 명 돌아가면서 찍자.”
처음엔 나와 효진이 언니가 팔짱을 끼고 사진을 찍었고, 소희와도 그렇게 했다. 소희와 효진이 언니가 사진을 찍고나서, 마지막으로 지나가던 사람에게 부탁해서 우리 셋이 다정하게 사진을 찍었다. 그렇게 사진과 함께 이 곳의 아름다운 풍경도 함께 담을 수 있었다.
보은환타지 (18)
온통 화사하게 피어난 꽃 천지였다. 이리로 둘러보나 저리로 둘러보나 빛깔은 가지각색이었지만, 그 사실 하나만큼은 다를 바가 없었다. 저 멀리 보이는 공원의 전경까지 울긋불긋한 물결들이 초록빛과 함께 어우러져 아름다운 색채를 냈다.
자전거가 다닐 수 있는 길이 있는 그 공원의 한 바퀴를 죽 돌면서, 그 모든 모습을 사진 속에 차곡차곡 담아낼 수 있었다. 조금의 아쉬움을 뒤로한 채 효진이 언니와 나, 그리고 소희는 다시 자전거에 올라탔다.
“자, 그럼….”
“이번엔 어디로 갈꺼야, 언니?”
“응? 아, 저 앞으로 죽 직진해서 가기만 하면 돼.”
효진이 언니는 또 다시 페달을 천천히 굴리기 시작했다. 소희와 나 역시 뒤에서 발을 굴리며 거들어주자, 자전거는 보다 손쉽게 공원 밖으로 빠져나갔다.
“우와….”
양 옆으로 꽃밭이 보이는 길목에 다다르자, 저절로 탄성이 터져 나왔다. 한쪽에서 다른 쪽을 보는 것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느낌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 공간에 가득 차 있는 모습 때문에 그 풍경은 더욱 더 활기차 보였다.
“여기서부터는 페달도 조심히 굴려야겠다. 사람도 많으니까….”
그렇게 말한 효진이 언니는 이제부터는 신호를 보낼 때만 페달을 굴려야 한다고 덧붙였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등받이에 편안히 기대려고 몸을 숙였다. 그런데 그 순간….
‘꾸르륵-.’
배에서 이상한 소리가 났다. 내 배에서 난 소리인데, 나까지 깜짝 놀라서 움찔했다. 그런 나를 바라보던 소희와 효진이 언니가 이상한 소리를 냈다. 내가 고개를 들어 바라보자, 아니나 다를까. 웃음을 참는 소리였다
“뭐, 뭐야. 너 배고픈 거야?”
“…….”
나는 민망함을 참으면서 오른 손을 들어 시계를 보았다. 아까 전까지만 해도 잘 몰랐었는데, 꾸르륵 소리가 나니까 이제 서야 알 것 같았다. 지금은 점심시간 때인 한 시가 넘었다는 것을 말이다.
느껴지지 않았던 배고픔이 심해진 것 같았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는 소희를 이상히 여기며 물었다.
“넌 안배고파?”
“응? 나는 뭐….”
아침밥만 먹고 지금까지 먹은 것이라곤 붕어빵과 아이스크림밖에 없는 소희의 입에서 배고프다는 말이 나오지 않을 리가 없다. 소희 역시 나와 마찬가지로 얼굴을 붉히며 배를 슬쩍 문질렀다.
“나도 배고프다, 언니.”
“그렇지? 뭐라도 먹고 싶다.”
“…….”
효진이 언니는 조금 난감하다는 듯하다 표정을 지었다. 아쉬워하는 듯한 기색도 엿보이는 표정이었다. 나는 효진이 언니에게 왜 그런 얼굴을 하고 있냐고 물었다. 하지만 그 질문을 하자마자 효진이 언니는 나에게 되려 되물었다.
“너희들, 이 근처에 민물 수족관이 있는 거 알아?”
“민물 수족관?”
‘아니, 잘 모르겠는데….’라고 대답하려던 나는 희미한 기억을 떠올리고 멈칫했다. 청룡열차에서 내릴 때 받았던 팸플릿을 읽으며 우연히 스쳐지나갔던 글씨 민물수족관, 그것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응, 알아. 매운탕, 그 정겨운 추억을 일깨워 드립니다. 라는 그 매운탕촌의 매운탕이고, 그 옆에가 바로 민물 수족관, 맞지?”
“응, 정확히 알고 있네. 그래서 거기, 조금 늦더라도 거기 구경 가려고 했는데….”
“가려고 했는데?”
“이왕 이렇게 된 거, 매운탕 촌에서 점심부터 먹자! 언니도 아직 안 먹었어.”
효진이 언니가 활짝 웃으며 말했고, 우리의 동의를 구했다. 대답은 당연히 그렇게 하자는 것이었다.
“자, 그럼 계속해서 천천히 앞으로 갑니다~.”
그래도, 가는 길이 변함이 없다는 것이 다행이라면 그나마 다행이었다. 우리의 배고픔 때문에 목적지가 바뀌었다면, 효진이 언니에게 정말이지 미안했을 것이다. 자전거를 잘 다루지 못하는 효진이 언니는 아직 들어왔던 곳을 빠져나가게 하기엔 너무나 힘들어 했을 테니까.
“꽃이 꼭 양 옆으로 수놓인 것 같다. 그렇지?”
“응, 정말 그래.”
색만 해도 열 가지가 넘는 꽃들이 바람을 맞으며 이루어지는 화사한 춤사위, 그것이 너무나도 아름다워서, 소희와 나는 가는 길 내내 넋을 잃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보은환타지(19) 2007-05-25 12:30:32
민물 수족관에 가기위해 지나는 꽃길은 마치 시장 통처럼 복닥거리고 있었다.
울타리가 놓여 있는 길 안에서 한가롭게 거닐며 보기만 해도 멋진 풍경을 휘 둘러보고 있는 사람들이라던가. 그 풍경을 더 멋지게 담으려고 일부러 여기저기를 기웃거려보는 사람들. 또 어느 초등학교에서 소풍을 나왔는지, 넓은 뜰에 자리를 잡고 도시락을 먹는 어려보이는 학생들. 단체로 그림그리기 대회를 나왔는지, 화판에 도화지를 대고 연필로 열심히 스케치를 하는 중고등학교 언니들. 무척이나 가지각색이었다.
“봐봐, 우리가 탄 자전거를 찍는 사람도 있어.”
정말이었다. 소희가 가리키는 곳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찰칵’하는 소리와 함께 새하얀 플래시가 계속해서 우리 쪽을 향해 반짝이고 있었다. ‘타고 있는 자전거가 너무 예뻐서 찍는 모양이다’라고 방향을 바꾸던 효진이 언니가 말했다. 언니가 그렇게 말하자, 의식을 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 정말 그런 것 같이 느껴져 기분이 좋았다.
사실, 누구나 다 타고 다닐 수 있는 귀족 자전거가 내 주위에 그렇게 없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보통 자전거들의 서너 배는 훌쩍 넘는 크기 때문에 두 대 이상이 다니면 움직임에 장애가 있고, 그렇기 때문에 띄엄띄엄 떨어져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도 우리가 고른 자전거는 확연히 눈에 띄었다. 그 만큼 예뻤기 때문이었다.
“너무 사진을 찍는다고 해서 의식하진 말고…. 이대로 죽 가는 거다?”
“…응.”
나는 내 등을 받치고 있는 쿠션에 몸을 편하게 기댔다. 자전거의 천장이 뻥 뚫려있는 탓에 자연스럽게 밀려 들어오는 따뜻한 봄바람과 햇살이 얼굴을 간질이며 기분을 좋아지게 만들었다.
그런데 그 때,
팔랑-
“응?”
무엇인가가 머리 위로 부드럽게 내려앉았다. 노란색 꽃잎이었다.
“이게 뭐야?”
나는 두 어개 정도 떨어진 노란색 꽃잎을 손으로 집었다. 그런데, 그 순간…. 은은한 라일락향을 남긴 꽃잎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에?”
손에 닿자마자 녹아버린 것이다. 내가 당황하고 있는 사이에, 라일락향이 아닌 또 다른 은은한 향기가 코 끝을 찌르며 부드러운 내음을 풍겼다. 순식간에 사라져버린 꽃잎을 보며 신기해하고 있던 소희는 나를 바라보려다가 깜짝 놀라서 말했다.
“희주야, 네 머리 위에….”
“응? 너도……?”
하늘 위에서 점점 많은 꽃잎이 떨어졌다. 하늘, 노랑, 분홍, 하양…. 그런데 손등, 혹은 머리 위에 닿을 때마다, 그 모습이 남아있기는 커녕 은은한 향만 남기고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는게 일쑤였다.
“하늘 좀 봐!”
거의 모든 사람의 이목이 하늘로 향하고 있었다. 거의 폭죽처럼 터져 나오는 꽃잎은 특별히 마련한 깜짝 이벤트인 듯 싶었다. 귀가 윙윙거릴 정도로 크게 울리는 확성기의 목소리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특별이벤트입니다. 특수한 향신료로 만들어진 연출 된 꽃잎은 입으로 맛보아도 문제가 없으며, 그 자리에서 흩어져 깊은 향기만을 남깁니다.)
정말 신기했다-
그 특별한 이벤트 덕분에, 내 몸에는 그 향기가 곳곳에 스며들어 기분좋은 향기가 났다. 효진이 언니나 소희도 같이 꽃잎을 맞았지만, 색깔이 다른 것에는 이유가 있었던지 제각기 다 다른 냄새가 났다. 페달 밟는 것도 멈추고 가만히 있던 효진이 언니는 다시 앞으로 나아갈 준비를 하더니, 내 쪽을 돌아보며 싱긋이 웃었다.
“자, 그럼 다시 출발한다?”
“응.”
삐걱-
자전거는 다시 천천히 출발했다. 그런데 이번엔 얼마 지나지 않아서, 졸졸졸 거리는 시냇물 소리가 귀에 닿을 듯이 크게 들리기 시작했다.
“우아아….”
맑은 냇가의 물이 햇살에 비쳐 마치 다이아몬드처럼 반짝거렸다. 어느 시골이었다면 눈길도 가지 않았을 그런 풍경이지만, 물이 더러워지지 않게 손을 대지 못하도록 막아놓은 시냇가는 정말 아름다웠다. 그 근처에서 살랑거리는 갈대밭은 산뜻해 보였고, 더욱이 시선이 가는 것은 올망졸망 피어있는 예쁜 꽃들이었다.
“자, 이제 이쪽 길로 들어가려면 내려야해.”
자전거는 통과하지 못할 듯 싶은, 상당히 좁은 길목이 나왔다. 효진이 언니는 내리면서 자전거 내부의 빨간색 버튼을 꾹 눌렀고, 그와 동시에 자전거의 모든 기능이 정지되어 바퀴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내리면서 우리의 손을 꼭 잡은 효진이 언니가 나에게 물었다.
“희주야, 배고파도 우리 구경부터 할까?”
“응!”
“소희는?”
“괜찮아, 구경부터 할래.”
“자, 그럼 빨리 가자!”
힘차게 걸음을 옮기며 지나치는 길에는, 정겨운 글자 ‘민물 수족관’이 새겨진 커다란 표지판 하나가 세워져 있었다.
보은환타지(20) 2007-06-01 07:12:24
“민물수족관은….”
천혜의 자연경관을 가진 속리산의 배경과 어울리는 테마코스였다. 현장 체험 학습을 위해 속리산을 찾아오는 전 국의 학교들이라거나, 가족 관광객들 역시 빠지지 않고 필수적으로 들린다는 이곳은 나이에 상관없이,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누구나 찾는다는 명소 중 하나였다.
풍경 또한 아름다웠다. 자연에서 볼 수 있는 민물고기를 담가놓은 수족관이라고만 생각할진 몰라도, 실상은 판이하게 달랐다. 크고 화려한 물고기들을 감상할 수 있는 정식 수족관보다도 더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는 곳이 이 곳이었다.
또한 분위기와 어우러지는 깔끔한 맛으로 새로운 매니아 계층까지 만들어낸 매운탕촌은 이미 전국적으로 각광을 받는 곳으로도 유명했다. 또한 소나무가 우거진 옛날 저자거리의 정겨웠던 풍경을 그대로 재현한 듯한 매운탕촌의 겉모습은 보기만해도 눈에 즐거움을 주는 명물이었다.
십자모형 길이 여러 개 겹쳐있는 사이사이로 맑은 물이 흘러내렸다. 고운 흙길을 조심조심 건너면서 내려다보는 수족관의 민물고기들의 종류는 넘겨보아도 수십 가지는 넘는 것 같았다. 햇빛을 받아 맑게 빛나는 물속에서 보이는 물고기들은 정말 예쁘고 고운 저마다의 빛깔이 났다.
그러다가, 문득 발견된 화려한 외양의 물고기가 내 눈길을 확 잡아끌었다.
“그래서, 앞으로는….”
“언니!”
잘 흘러가고 있던 효진이 언니의 설명을 끊어버리자, 소희와 더불어 두 사람의 시선이 나에게로 향했다. 나는 얼른 검지손가락을 흔들었고, 소희와 효진이언니의 시선이 다시 내 손 끝으로 옮겨졌다.
“…어머.”
단번에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한 쪽 손으로 입가를 가린 채 눈을 동그랗게 뜬 소희는 ‘우리 나라에 이렇게 예쁜 민물고기도 있었나?’하며 고개를 갸웃거림과 동시에 감탄했다.
내가 가리킨 물고기를 잠깐 훑어보던 효진이언니는 상냥하게 웃으며 말했다.
“‘비단잉어’야.”
“비단잉어?”
“민물고기라고는 하지만, 색깔 곱고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건 몇 천만 원을 호가하는 고급 물고기잖아. 못 들어봤어?”
“…몇 천만 원.”
저절로 입이 벌어지는 어마어마한 액수였다. 맙소사, 함부로 손댈 수도 없는 귀한 가치의 물고기를 이렇게 키워도 되는 건가? 아, 하지만 그러고 보니….
“자연에서 살던 물고기라면 자연이 제일 편안한 휴식처야.”
마치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내 질문을 얼른 낚아채서 답해주는 효진이 언니였다. 새삼 정말 모를 것 없는 가이드북 같은 언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기….”
“응? 왜 그래?”
철없이 비명을 내지르던 것을 멈춘 소희가 다시 말문을 열었다. 그러면서 가리킨 것이 물 위였다. 곱게 다듬어진 작달만한 나무판자가 수면 위로 동동 떠올라 있었다.
‘관상용’
자세히 보니 조화의 꽃으로 예쁘게 꾸며진 그 나무판자에는 칼로 새겨진 듯한 글씨가 또렷히 적혀 있었다. 이름하야 ‘관상용’. 다른 종류의 물고기보다 더 빼어나게 아름답거나 고운 빛깔을 자랑하는 물고기들만이 모여 있던 것이다. 비단잉어 역시 그러한 쪽의 ‘관상용’이었다. 점심시간이 아닌 현재까지는 더욱 더 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이리로 모아지고 있었다.
“언니.”
“응?”
“관상용이면, 다른 용도의 수족관이 하나 더 있는 거야?”
“응. 그래.”
“엣, 정말?”
갑자기 소희가 나섰다. 한번 둘러보고 싶다는 의사가 다분히 담긴 눈길로 효진이 언니를 바라보았던 탓에, 효진이
언니는 선택의 여지가 없이 또다시 가이드북 역할을 해주어야만 했다.
“체험용이 그 하나야.”
“체험용? 그건 뭐하는 건데?”
민물 수족관의 체험용 수족관을 통해, 체험학습을 해보거나 체험 활동을 실천해보는 시간이 있다.
그것이 바로 체험용 수족관과 관상용 수족관이 나누어지는 이유였다고, 이어지는 효진이 언니의 설명이 있었다. 효진이 언니는 말을 끝마치려다가 ‘아차’하고 생각난 무엇이 있는지 덧붙였다.
“그리고…. 그 체험활동에서 활어나 송어를 자기 손으로 직접 잡는다면 비싼 그 물고기들을 공짜로 얻을 수 있어.”
“진짜?”
“응, 게다가 이건 돈을 내지 않아도 되는 무료코스거든. …너도 한 번 해보고 싶어?”
“응!”
소희와 내 대답에 우리 둘은 역시 못 말린다는 듯이, 효진이 언니는 살짝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지어주었다.
“그럼 조금만 기다려. 곧 그 이벤트가 열릴꺼니까…. 좋았어! 이왕이면 한 마리 잡고 점심 값 괜히 쓰지 않는 거다. 알겠지?”
“당연하지!”
따슷한 햇살이 내려비치는 한 낮의 정오에, 나는 뜬금없는 이벤트에 참여하게 되었다..
보은환타지(21) 2007-06-15 14:02:23
“으….”
차가운 물에 두 손을 담그자 온 몸이 부르르 떨려왔다. 그러다가 미끄러지듯이 헤엄치는 민물고기의 지느러미에 눈길을 두게 된 나는 손을 한 번 휙 내저어 보았다. 비록 그 날쌘 민물고기를 손으로 잡아보려는 건 아니었지만, 본의 아니게 그 미끌미끌한 몸만큼은 만져 볼 수 있었다.
“뭐하는 거야. 이건 망대로 잡아야하는 거란말야.”
나는 고개를 들어 위를 올려다보았다. 양 허리에 손을 얹은 채 틱틱거리고 있는 소희가 보였다. 민물고기를 잡는데 필요한 기본 도구를 가지러 간다더니, 그새 돌아온 모양이다.
그런데 왜 갑자기 바보취급을 하는 거야.
“야, 그런 건 나도 안다 뭐―. 그냥 기다리다보니까 심심해서 그런 것 뿐인데….”
“시끄러. 이거나 받아.”
소희가 새하얀 그물이 걸쳐져 있는 망대를 건넸다. 엉덩이를 털고 일어서서 망대를 받은 나는 의아스런 눈빛으로 소희를 바라보았다.
“이거 가지고 뭐하라는 거야?”
“뭐하긴…. 민물고기를 잡는 거지.”
“아니, 내 말은….”
“그거가지고 민물고기를 어떻게 잡느냐구?”
“언니!”
불쑥 나타난 효진이 언니가 소희 대신 물었다. 뭐야―. 효진이 언니의 갑작스런 등장에 깜짝 놀라긴 했지만, 나는 여전히 의심스런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기본적으로 송어는 저렇게 날쌘데, 도대체 이걸로 잡아? 하다못해 미꾸라지같은 다른 민물고기는 말할 것도 없구….”
“걱정 마, 설마 그런 기본적인 문제도 해결 안했는데 이런 이벤트를 마련했을까봐?”
“…어떻게 문제를 해결하는 건데?”
“여기 있는 민물고기들은 전부 ‘슬롭매드신’이라는 특수한 약물을 투여했어. 아, 약물을 먹은 물고기라고 해서 특별히 우리 몸에 나쁜 영향을 주는 건 아니고, 물고기의 질을 좋게 하는 대신 물고기의 움직임을 퇴화시키는거야.”
“…효진이 언니는 도대체 어떻게 그런 걸 다 알아?”
“물론, 망대 빌려주는 아저씨께 들은 이야기지.”
…그럼 그렇지. 저런 것 까지 알았으면 차라리 서양 의학계로 진출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나저나 ‘슬롭매드신’이라. 속리산 자체에서 그런 약품까지 따로 개발한 거라면 정말 굉장한 일이다. 물론 그런 것 까지 확인 할 만한 자세한 내막은 나로썬 알 길이 없지만.
“자, 그럼 이제부터 잘 새겨들어.”
“뭘?”
“오늘 우리의 목표량이 미꾸라지 세 마리와 송어 한 마리라는 거.”
“…참나.”
망대를 흔들면서 과장된 말투로 얘기하는 효진이언니와 우리의 나이 때가 꼭 바뀐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우리보다도 더 좋아하는 저 어린아이 같은 모습이라니. 정말 누가보아도 그렇게 느꼈을 것이다. 말갛게 웃던 효진이 언니가 우리를 홱 끌어당겼다. 몸이 휘청거였다.
“꺄아악-.”
“굼뜨게 움직이지 말고 빨리 빨리 움직여야 돼. 망대도 빌린 거라서 시간 넘기면 연체료 물어야 된단 말야!”
“가, 간다니까? 이것 좀 놔줘~!”
…목표량 미꾸라지 세 마리, 송어 한 마리인 우리의 민물고기 잡기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 * *
“도망친다!”
“소희야, 뭐해. 잡으라니까?”
“야, 그게 쉬운 줄 알아?”
첨벙-
쉴 새 없이 튀기는 물 때문에 바짓가랑이가 흠뻑 젖어버렸다. 우으, 송어를 기르는 물이 미지근한하길 다행이었다.
옷이 물에 젖어도 당장에 오한이 서리진 않았으니까. 그 덕분에 민물고기 잡기에만 열중할 수 있는 것이 다행이었다.
“꺄아아아~.”
확실히 이 곳에 있는 민물고기의 움직임은 평소 보아왔던 다른 곳의 물고기들과는 달리 현저하게 느려보였다.
망대까지 있으니 잡는데 수월할 것이 당연하다 생각했지만, 그렇게 쉽지만은 않았다. 나는 발밑에서 팔딱거리는 송어 몇 마리를 보며 입맛만 다셨다.
“어? 희주야!”
기우뚱-
바보같이 망대만 휘두르던 내 몸이 갑자기 휘청였다. 뭐지? 아아, 바보 같이 혼자 돌덩이에 발이 걸린건가? 아, 안돼. 이렇게 넘어지면….
“효진이 언니!”
“휴…. 다행이다.”
푹신한 무언가가 내 몸을 받쳐주었다. 효진이 언니가 뒤에서 나를 안아준 것이다. 천만다행이었다. 그런데 손에 들고 있던 망대에는 뜻밖에도….
“송어?”
맙소사. 넘어지는 순간 뭐가 걸리나 했더니, 월척이었다.
보은환타지(22) 2007-06-22 08:58:57
싱싱한 물고기를 그대로 옮겨 요리해주는 식당의 서비스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자신이 이고 가겠다고 박박 우겨 망대를 들고 가는 효진이 언니는 분명 힘겨워 보였지만 표정만은 밝았다.
“정말 너 덕분에 돈 굳었다!”
…이것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렇게 큰 상관은 없었다. 효진이 언니가 좋아하면 나도 좋은 거고, 더군다나 나 덕분에 우리 세 사람이 회를 먹을 수 있게 된거니까.
매운탕 촌 안으로 들어가는 길 앞에 다다랐을 즈음에, 효진이 언니의 발걸음이 딱 멈추었다.
“희주야.”
“응?”
“넌 어떤 기준으로 선택하고 싶어?”
“…….”
갑자기 바뀌어버린 주변의 모습 때문에 미처 대답을 할 겨를이 없었다. 우와, 진짜 이 길의 건너편과는 완전 다른 세상 같은 초가집 천지라니- 요새에는 TV속에 사극에서나 볼 수 있는 민속 저자거리 같은 풍경이 내 시야를 한 가득 메워내고 있었다. 리메이크한 대장금의 짧은 촬영장소로 방송에도 나왔을 것이다.
딱콩-
“아얏.”
“야, 효진이 언니가 묻잖아.”
“아, 그게….”
역시 송어하면 회라는 건 나도 잘 알고 있기에, 횟집을 골라야 했다. 하지만 그것 역시 쉽지 않았다. 비록 매운탕 촌이긴 하지만 횟집의 비율은 1/3을 넘어서서 횟집을 고르기도 쉽지가 않았다.
“그렇다면 가격을 보고 골라야하지 않을까?”
“역시 그런가, 그렇지만 식비를 많이 아꼈으니까 조리 비용은 많이 들어도 별 상관이 없는데. 맛있게만 먹을 수 있으면.”
“그렇다면 제일 큰 데로 가보자!”
나는 무작정 걸음을 옮기며 앞서나갔다. 그런 내가 영 못 미더운지 따로 찾아보겠다고 말하는 소희였지만, 상냥히 웃으며 부탁하는 효진이 언니덕분에 어쩔 수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같이 찾아보기로 했다. 효진이 언니와 나, 그리고 소희는 지금 부드러운 황톳길을 나란히 서서 걷고 있었다. 그 길이 얼마나 편안했던지, 그리고 믿음직스런 소나무들이 길 양 옆으로 우거져있는 덕분에 바람이 불어올 땐 항상 은은한 솔향 까지 느낄 수 있었다.
그때 소희가 발견한 것이 ‘ㄷ’자 모양의 초가집이었다. 옛날로 치면 주막쯤 되는 곳 같았는데- 북적북적 모인손님들이 모두 마당에 있는 상에 걸터앉아 시원한 국을 떠 먹고 있었다.
“주막 같은 곳도 있네, 저기서 먹으면 시원하겠다.”
“…우와, 정말. 에, 뭐야. 그런데 매운탕집이잖아.”
“지금까지 지나온 횟집이 한 다섯 개 정도는 됐을꺼야. 그냥 그 중에서 한 곳 고르고 먹는 게 더 낫지 않아?”
“에에, 그래도 한 곳만 더.”
“그만해, 이젠 기운이 없어서 돌아다니지도 못 해.”
“…그럼 저기 한 번 들어가서 물어볼까?”
소희가 용감하게 일어섰다. 배가 고프긴 정말 많이 고픈 것 같았다. 역시 기운이 없어 바위 위에 힘없이 걸터앉아 있는 효진이 언니가 물었다.
“회도 해주냐고 물어보게?”
“응.”
“그럼 나도 같이 가.”
배고프다고 해서 가만히 앉아있기만 하기보단 움직여서 소득을 보는 게 더 나을 것 같았다. 주막 안에 볼이 발갛게 물든 아저씨 분들이 많은 것 같아서 들어가기가 조금 망설여지긴 했지만, 그것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그렇지만 소희와 함께 주막에 들어섬과 동시에, 조금 걸쭉한 술냄새와 신선한 물냄새가 코를 찌르며 말하려던 것을 방해했다.
잠시 동안은 그렇게 멍청히 서있기만 했다. 오히려 가만히 서 있는 우리를 이상하게 여긴 아줌마가 접시를 상 위에 올려놓으려고 하다가 말을 거신 것이었다.
“뭐 시킬 거 있니?”
“아뇨, 그게 아니라….”
이곳의 주인인 듯싶은 아주머니는 정말 옛날 주막의 아낙네처럼 머리를 예쁘게 땋아 화초머리까지 올리고 있었다. 그 모습이 자못 신기하여 내가 물어보려고 하던 것도 잊은 채 빤히 쳐다보고 있자, 가만히 있던 소희가 나섰다.
“저기 아주머니, 여기 매운탕 하나만 전문으로 다루나요?”
“응? 아니, 그런 건 아니다만….”
“음, 그럼 민물수족관에서 잡아온 송어도 돈 받고 조리해 주실 수 있죠?”
“그렇고 말고.”
“와, 회까지 다뤄주시는 거구나.”
약간 감탄한 듯한 소희가 몸을 돌려 바깥의 앉아 있는 효진이 언니를 향해 들어오라는 손 모션을 취했다. 물론 얼른 오라는 소리였다.
보은환타지 (23)
이런 곳이 있었는지 모르겠다. 손님의 시선을 끌기 위한 외관은 그렇다 쳐도, 내관까지 사극에서나 보던 주막의 모습으로 완벽하게 승화시킨 곳에 들어와 보니 왠지 낯선 느낌이 들었다. 약간은 거친 나무느낌이 나는 커다란 테이블에는 주로 가족 단위의 관광객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또, 비록 작은 가게였지만 손님들을 위해 마련해 놓은 듯 한 작은 코스프레도 있었다. 플래시 소리와 함께 사람들이 모여 있는 테이블을 향해 다가가자 보인 것은 선비차림의 옷을 입고 있는 아르바이트생이었다. 마주 보고 있는 종 차림의 또 다른 아르바이트생과 술잔을 기울이는 시늉을 하고 있는 그 선비차림의 아르바이트생은 꽤나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을 텐데도 그 행동이 꽤나 자연스러워보였다. 다른 건 몰라도 이곳을 찾은 사람들의 흥미를 유도하는 방법으로는 탁월한 것 같았다.
조금은 협소한 공간에 기다리는 사람은 꽤나 많았던 터라 조금 시간이 걸렸다. 복닥거리는 사람들 틈을 요리조리 피해나간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앗, 저기 자리 비었다. 빨리 가 앉자!”
마침내 네 명이 앉을 수 있는 테이블 자리 하나를 얻게 되었다. 우리에게 자리를 맡겨 놓았던 효진이 언니는 송어를 맡기고 돌아 온 뒤 사진 찍기에만 열중하고 있었다.
“후후…. 이거 과제물로 내면 딱이겠는데?”
나는 밥을 먹기 전에 기운이 다 빠졌던 터라 가만히 누워 효진이 언니와 소희가 하는 양을 지켜보기만 했다. 섬세하게 엮인 밀짚과 흙으로 덮인 벽 사이로 미풍이 불어오는 것 같은 착각이 들어서 그런가, 자꾸만 눈꺼풀이 무거워지는 것 같기도….
“이봐요!”
“…에?”
하필이면 그 상황에서 잠이 들려고 했던 나를 누군가가 깨워주었다. 다행이었다.
“누구에….”
“학생, 빨리 자리 치워!”
자세히 보니 하얀 천이 덮인 두 개의 접시를 들고 있는 아줌마다. 잔뜩 틀어 올린 머리를 보고 웃을 새도 없이 정신없이 상을 치워야 했다.
“효진이 언니! 소희야!”
“응?”
“어, 벌써 왔네!”
금세 상 쪽으로 달려온 효진이 언니가 고맙다는 표시로 아주머니에게 꾸벅 인사를 했다. 어느새 깔끔하게 상을 차리신 아주머니는 기분 좋게 고개를 몇 번 주억거리시더니 바쁜 걸음을 옮겨 사라져버리셨다.
“언니, 바로 먹어도 되는 거야?”
“잠깐만.”
또 다른 서비스 차원으로 아주머니가 가져다 놓으신 대야에 손을 씻은 효진이 언니가 흰 천을 드러내었다. 우와- 저절로 감탄이 나오는 연한 붉은색의 군침이 도는 속살에 입이 벌어졌다.
“이거 아까 내가 잡은 거 맞아? 난 한 마리 잡았는데 여긴 두 마리네.”
“아, 한 마리는 따로 시킨 거야.”
효진이 언니가 젓가락 한 쌍씩을 우리 손에 쥐어주었다. 그리고는 먼저 시범을 보여주려는지, 잠깐 기다리라는 시늉을 했다.
언니는 커다란 그릇에 채소를 덜어내고, 엷은 갈색의 콩가루를 뿌렸다. 또 마지막으로 초장을 뿌렸고, 그 다음은….
“에, 이게 뭐지?”
“왜? 그냥 빨리해. 먹고 싶단 말이야.”
“아니, 그게 아니라. 이건 못 보던 양념인데….”
대나무 그릇에 담긴 빨간색 양념을 쳐다보던 효진이 언니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우리의 닦달에 그러려니 하고 한 숟갈만 떠서 야채 비빔에 덜어 넣었다. 옅은 기름기가 도는 게 정말 맛있어보였다.
“와아….”
고기 한 점을 야채와 싸먹은 효진이 언니의 입에 미소가 감돌았다. 그리고는 손짓했다. 그 의미를 단박에 알아차린 소희가 확인을 하듯 물었다.
“먹어도 된다고?”
“응.”
“앗싸.”
앞 다투어 젓가락질을 하는 꼴이니, 한 접시는 금방 비워버렸다. 두 번째 접시에 담겨있는 송어를 먹으려던 차에, 효진이 언니가 의아하다는 듯이 한마디 꺼냈다.
“아무래도 이상해.”
“왜?”
“이건 초장 맛이 아닌 것 같은데…. 왠지 달콤하지 않아?”
“응? 잘 모르겠는데, 별로 먹어보질 않아서….”
“그래? 그럼 계속 먹어.”
결국은 마지막 한 점까지 깔끔하게 비워냈다. 뭔가 아쉬움이 남았던 찰나에 매운탕 한 그릇까지 서비스로 나왔다. 국물까지 맛있게 먹고 나서, 길을 나서려고 할 때만 해도 잘 몰랐다. 10번째, 20번째, 30번째, 이렇게 열 일행 중 한 일행의 먹을 차례가 되면 특별 양념이 첨가된다는 사실을.
음식까지 더 맛있게 먹다니,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었지만 정말 흐뭇했다.
보은환타지 24호 2007-07-13 10:21:58
“후아-”
배부르게 먹은 소희가 마룻바닥에 벌렁 드러누웠다. 크윽-. 자기 집 안방인 마냥 소화도 편안하게 했다. 아침 8시부터 발에 땀이 나도록 걸어서 그런가. 자리에 눕자마자 피곤해 진 듯 소희가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하암-.
“힘드니, 소희야.?”
효진이 언니는 우리와 다르게 엔돌핀이 넘치는 모양이었다. 노트북까지 꺼내서 과제물인 듯한 무언가를 열심히 치고 있었다. 나 참, 한 시간 정도는 같이 걸었으면서. 그 모습에 황당하다는 듯한 표정을 드러낸 소희가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힘들어. 조금만 쉬다가자.”
“그러지 뭐, 여기서 앉아 있기만 해도 저 담 너머 경치가 보이는데…. 쉬어.”
그래도 소화는 다 하고 자던가 하지. 살찔 텐데…. 나는 살짝 눈을 내리깔아 소희를 바라보았다. 효진이 언니가 고개를 갸웃했다.
“희주야. 너도 피곤하니?”
“아니. 별루….”
솔직히 피곤하기보단 심심했다. 숙제를 하고 있는 효진이 언니나 고된 걸음에 휴식을 취하고 있는 소희를 건들이 거나 말해 볼 수도 없는 노릇이니 더욱 그랬다.
저기 담 너머로 보이는 소나무들. 난 정말 소나무를 좋아하는데…. 차라리 이 시간에 저런 길이나 걷고 왔으면 좋겠다. 아까 잠깐 눈을 붙였기에 정말 피곤하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한 십 분쯤 지났다. 근데 그 짧은 시간이 왜 이렇게도 무료하던지. 활기차게 돌아다닐 때는 미처 느끼지 못했기 못했던 기분이었기 때문인지 한 시간은 거뜬히 지난 것 같았다.
“희주야.”
“응?”
그런데 효진이 언니가 갑작스레 나를 불렀다. 한 손엔 디카를 든 채로. 밝게 웃으며 그것을 흔들고 있었다.
“언니 자료 구해야 되는데. 잠깐 밖으로 나갔다오자.”
“응? 정말?”
“대신 조용히. 소희는 지금 잔다, 자.”
“…….”
드르렁-. 드르렁-.
그러고 보니까 미약하게나마 코고는 소리가 들렸던 것 같다. 정말 꿈결 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소희는 뭐 때문에 그런지는 몰라도 무척 즐거워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짧은 시간 안에 잠들어 놓고선 대체 뭔 꿈을 꾸는 건지-
“재방송을 보고 있는 건 아닐까.”
효진이 언니가 흥미가 인다는 듯한 표정으로 눈을 반짝였다.
“무슨 재방송?”
내가 되물었다.
“지금까지 왔던 길- 꽤나 볼만한 경치 많지 않았니?”
“응? 응. 그랬어.”
‘꽤나 볼만한’게 아니라 정말 대단한 경치를 지나왔었다. 뭐, 어쩌면 정말 그 꿈을 꾸고 있을지도 모르지. 근데 정말 행복한 표정이다. 무엇 때문인지는 몰랐어도 왠지 입가에 웃음이 흐를 정도였다. 그래도 그냥 지나치려고 했는데, 효진이 언니는 소희의 얼굴 표정이 신기한 듯 멀뚱멀뚱 보고만 있었다. 나는 그런 언니를 힘 있게 끌어당겼다.
“빨리 가자!”
“응? 응, 잠깐.”
효진이 언니가 재빨리 셔터를 눌렀다. 찰칵-. 새하얀 빛이 터지며 화면에 소희의 자는 얼굴이 담겼다. 잠깐 놀란 듯 눈 주위를 씰룩거리긴 했는데, 다행이도 잠에서 도로 깨어나지는 않았다. 푸하하하-. 멍청하게 입을 헤 벌리고 있는 모습을 절묘하게 찍은 사진인 터라 눈 꼬리에 눈물이 맺힐 정도로 소리 없이 웃었다.
나는 효진이 언니에게 엄지손가락을 치켜 올려 준 뒤 다시 길을 나섰다.
“히익!”
문을 여는 순간 깜짝 놀라 작은 비명소리를 냈다. 순간 내가 어디서 나온 것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단체 코스프레라도 하는 것일까? 길거리의 모든 사람이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평민다운 헤진 옷을 입고 있었다. 주막에 들어가기 전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효진이 언니가 시계를 확인했다. 오후 한시였다.
나중에 안건데, 그것도 퍼레이드의 일종이란다. 다만 그것을 자연스럽게 즐기도록 그리 화려하지는 않은 것이다.
그래도 정말 신기했다. 나와 효진이 언니는 지나가던 아저씨 한 분께 사진 한 장을 부탁했다. ‘흠흠.’ 잠시 헛기침을 하던 아저씨는 카메라를 들고 우리의 모습을 예쁘게 찍어주었다.
“우아….”
“뒤에 있는 사람들 덕분에 우리 얼굴이 더 튄다. 그치?”
“응. 근데 여기에만 있지 말고, 가게 같은 곳도 한 번 들러보자!”
“에, 나는 길거리 사진만 찍으면 되는….”
“에이, 언니. 한번만~!”
나는 정말 신이 나서 효진이 언니를 끌고 다니다시피 데리고 다녔다. 처음엔 조금 우물쭈물하다가, 그 후엔 그저 웃을 뿐 아무런 불평도 하지 않은 효진이 언니가 정말 고마울 따름이었다.
보은환타지(25) 2007-08-10 08:20:01
햇빛을 가리우듯 크게 우거져 있는 소나무 솔잎 사이로 찬바람과 함께 햇살이 비쳤다. 넓은 흙길에 소나무 모양대로 사람의 그림자대로 아로새겨진 금색 햇빛을 보고 걷자니 기분이 묘했다. 사방을 둘러보았다. 점심 식사를 마쳤으니 가볍게 산책만 하고 돌아갈 참이었는데, 나오고 보니 그것이 쉽지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주위에는 마치 사극을 촬영하는 전용 세트장인 것 마냥 초가집이 즐비했다. 아까 올 때는 미처 살펴보지 못했으나, 음식을 하는 전문점 외에도 각종 물건을 파는 상가가 텅 빈 초가집 안을 대신하고 있었던 것이다. 속리산 정경이 담겨있는 손수건 이라던지, 나무 안마개라던지, 묵주라던지 작은 부처님 상이라던지…. 관광명소에 있는 가게라면 당연히 팔곤 하던 기본적인 물건을 차려놓은 곳부터 시작해서, 굉장히 특이한 영업을 하는 곳도 있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코스프레 의상을 빌려주는 가게였다. 아까부터 이 길을 오가던 ‘옛 사람 향취’ 퍼레이드를 따라오다가 모이게 된 사람들을 위한 작은 공간이었던 것이다.
눈에 익은 동네 아낙네 차림, 어린 동자가 입는 옷차림, 고운 빛깔의 한복 치마가 돋보이는 아가씨 차림, 도령 차림, 고고한 선비네의 옷차림…. 그 수많은 의상들을 말하려 치면 수도 없이 많겠지만, 다른 초가집과 달리 유난히 굵은 유리가 토벽을 대신하는 그 커다란 가게를 곁눈질만 해보아도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였다.
사실 아까부터 이 거리를 지나던 퍼레이드의 모든 인원이 아르바이트생으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그 많은 사람들 중 거의 반 이상이 순전히 재미있는 체험을 하기 위해 옷을 갈아입은 관광객이었던 것이다. 그들이 웃으면서 카메라를 집어 들고 걷는 모습이 어쩐지 언밸런스하다 했다.
계획사업으로 이루어진 공식 퍼레이드는 아니고, 기존에 있던 즐길거리 이벤트를 발전시킨 것이었으나 나름의 훌륭한 성과는 어느정도 본 셈이다. 광고비를 그리 크게 들이지 않고도 작은 음식마을인 이곳을 북적이게 했으니.
짧은 시간만 아니었다면 나도 한 번 입어보고 사진도 찍어 보았을 것이다. 고운 색의 치마에 왠지 눈이 갔던 것이다. 그러나 가게로 향하는 발길만큼은 효진이 언니의 손에 의해 제지당하고 말았다.
“나중에. 돌아오는 길에 하자. 소희도 없는데….”
“나중에가 어딨어. 언니는 바빠서 끝까지 있어주지는 못하잖아.”
“무슨 소리야? 너희 돌아오는 길엔 있을꺼야.”
그러더니 내 손을 꼬옥 붙잡았다. 소희가 깨어나 있을지도 모른다며, 왔던 길을 갑자기 되돌아가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앗, 잠깐. 나온 김에 해야할 게 아직 한가지 더 남았는데….
“언니, 잠깐만!”
“왜에~?”
“기념품 하나 사 줘.”
“갑자기 왜? 여기에서 파는 건 다른 데서도 쉽게 구할 수 있잖아. 굳이 살 필요가….”
“아냐. 안 그래.”
이번에는 내가 효진이 언니의 손을 꼭 잡았다. 코스프레 의상을 빌려주는 곳 외에도, 특색 있는 기념품을 만들어 파는 곳이 몇 군데 더 있었던 것이다. 그 중 하나가 내가 가리키고 있는 곳이었다.
핸드폰 고리, 열쇠 고리 등 가지고 다니는 물건에 장식해 놓을 수 있는 작은 악세사리를 파는 작은 초가집이었다. 다른 곳에 비해 겉모습이 볼 품 없는 것은 확실했지만 확실히 인기는 많은 것 같았다. 다른 곳에 비해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던 것이다. 줄은 빠르게 줄어들었다가 다시 길어지는 과정을 반복하고 있었다.
물건이 불티나게 팔려나가는 모양이었다.
“가보자, 줄도 금방 줄어들잖아.”
“아니, 뭐….”
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는 효진이 언니를 이끌고 재빨리 10번째 순서를 차지했다. 거래가 상당히 빨리 이루어지는 모양인 듯, 우리 앞에 줄을 서고 있던 사람들이 정말이지 금방 금방 빠져나갔다.
“…우와.”
우리 차례가 되어 파는 물건을 주욱 훑어보았는데, 입이 벌어질 정도였다. 작은 열쇠 고리, 핸드폰 고리가 분명했는데, 그 끝에 달린 동글동글하고 작은 유리병이 너무나도 신기했던 것이다.
‘영상이 저절로 비춰지는 것인가?’ 라고 착각하게 만들 정도였다. 다각도에서 볼 때마다 작은 유리병 안에 들어있는 입체 그림이 시시각각 변화되는 것이다. 지금까지 지나왔던 속리산의 명물이 그 작은 것에 전부 담겨있었다.
“얼마에요?”
나랑 똑같이 신기해하던 효진이언니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아주머니에게 물었다.
“만 원이에요.”
아주머니가 넉넉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효진이 언니는 주머니에서 만 원을 꺼내 얼른 아주머니께 건네드렸다.
우리 역시 앞서 있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줄에서 재빨리 빠져나왔다.
그리고 나서는, 벤치에 앉아 한 동안 그 열쇠고리를 멍하니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말티재, 리프트, 청룡열차, 꽃밭, 잔디밭, 스케이트장, 다시 꽃밭, 꽃마차….
처음부터 이 길을 다시 걸어오는 듯, 머릿속에 쌓이고 쌓이던 기억들이 다시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 * *
“어디 갔다 오는거야.”
돌아오자마자 우리를 반기는 것은 소희의 투정 어린 목소리였다. 깨어나자마자 주위사람들이 자기를 힐끔거리는 것부터 봤다느니, 우리 둘이 사라져서 걱정을 했다느니, 계산은 안하고 간 줄 알고 마음 졸였다느니, 꿈이라도 꾼 줄 알았다느니….
“스톱~!”
귀를 쟁쟁하게 만들 정도로 끊임없이 늘어놓는 소희의 말에 효진이 언니가 제재를 가했다. 효진이 언니는 네가 잠든 줄 알고, 깨울 수는 없었기에 우리 둘이 잠깐 나갔다 오려고 했던 것 뿐이라며 소희를 달랬다.
“분명이 잔 건 내 잘못인데…. 어딜 갔다왔길래 그렇게 재미있는 표정이야? 먼 데까지 갔다온거야?”
“아니. 가까운데 갔었어. 근데 속리산을 밟았던 처음부터 다시 걸어온 기분이더라.”
“뭐? 리프트 타는 장소까지 갔다왔었던 거야?”
“아니.”
“그럼 어딘데?”
효진이언니가 싱긋 웃으며, 나 대신 대답해 주었다.
“바깥에.”
보은환타지(26) 2007-08-17 07:31:53
주문을 받느라 정신이 없는 아주머니에게 인사를 한 뒤 문 밖으로 나왔다. (그 와중에도 친절이 받아주셨다.) 배도 불렀겠다, 소화도 잘 했겠다, 멋있는 구경도 했겠다. 더할나위없이 가뿐한 속이었지만 소희만큼은 그렇지 않은 듯 했다. 자전거가 있는 곳을 향해 걷는 내내 불편한 얼굴이었다.
“체했어? 아까부터 표정이 이상해.”
“…별거 아냐.”
별 거 아니긴. 아까부터 옆에서 소희의 표정을 살피던 효진이 언니가 다가와선 소희의 손을 문질러 주었다. 그리고는 갑자기 엄지 마디 아래 둥그렇게 튀어나오는 부분을 꾹꾹 누르기 시작했다. 소희가 ‘아얏’하고 비명을 지르며 손을 뺐다. 효진이 언니가 걱정이 가득 담긴 한 숨을 푹 내쉬었다.
“어쩌지? 체 한 것 같네. 점심 먹고 바로 잠들어서 그런가?”
“약 안 팔아? 약이라도 먹으면….”
“체 했을 때 무조건 약 먹는 게 좋은 게 아냐. 속 편히 하고 쉬는게 제일 좋은데. 저어기 까진 걸어가야 하거든.”
“괜찮아. 걸을 수 있어.”
소희가 ‘끙’하는 소리를 냈다. 표정으로 봐서 그리 참을 만한 것 같지는 않는데, 애써 버티는 모양이었다. 소희를 위해서라도 걸음을 재촉해야만했다.
* * *
“자, 희주가 저 반대편에서 받쳐 줘.”
“…으랏차.”
간신히 자전거가 있는곳 까지 걸어오긴 했지만, 소희의 안색은 여전히 좋아 보이지가 않았다. 효진이 언니가 페달을 밟는 앞좌석에 앉으며 걱정스레 말했다.
“소희야, 가만히 앉아있지 말고 최대한 밖을 봐. 알았지?”
“…알았어.”
효진이 언니가 페달을 밟기 시작하자 자전거가 기우뚱거렸다. 능숙한 솜씨로 차들을 비껴 그 왼 쪽 자전거 도로로 자전거를 몰았다. 그리고는 갑자기 페달을 느릿느릿 굴렸다. 자전거의 흔들림을 최대한 줄이도록 천천히 가는 것이라 했다.
“…야.”
등받이에 몸을 편하기 기대고 있던 소희가 갑자기 내게 말을 걸어왔다. 환하게 밝아진 얼굴로 왼쪽 바깥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산 좋고 물 좋은 곳이면 어디든 볼 수 있는 시냇물이었다. 굽이굽이 흐르는 냇물은 자갈이 훤히 비칠 정도로 물이 맑았다. 이제 정오를 맞아 한낮쯤 되었으려나. 얼기설기 하늘을 수놓았던 구름을 헤치고 밝은 해가 떠서 그런지, 금빛 햇살을 반사하는 반짝이는 냇물이 그 어느때보다도 더 아름다워 보였다. 마치 다이아몬드를 잘게 부숴 서 온통 흩뿌려놓은 것처럼.
“…예쁘네.”
맑은 물이라면 옛날에도 보아왔던 것이다. 개발이 한참 덜 이루어졌을 때도 물놀이를 자주갔었는데, 그 때도 보기가 어찌나 좋은지. 어느 곳이나 마찬가지일진 몰라도 한 참 만발해 있는 꽃을 비춰주는 모습이니 예쁘다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왼쪽엔 하 맑은 물이, 오른쪽엔 꽃밭이. 또 효진이 언니의 노력으로 흔들림이 전혀 없는 자전거에서 시원한 바람을 쐬며 가다보니, 소희의 어두웠던 안색이 차차 밝아지는 듯 했다. 다행이었다.
“다 왔다.”
끼이이익-
효진이 언니가 자전거를 멈춰 세웠다. 고개를 들어보니 푸른 솔잎이 가득한 공원이 보였다. 보기만 해도 시원해지는 그런 곳이었다.
“소희야, 먼저 내려.”
“어, 이젠 괜찮아. 안 잡아줘도 돼.”
맨 마지막으로 내가 내렸다. 꽃마차 앞에 나란히 선 우리 셋은 선 자세 그대로 입이 딱 벌어졌다.
* * *
정이품송이었다. 그것도 옛날 고고했던 원추형의 자태를 그대로 복구한 정이품송.
잦은 폭풍과 비바람으로 가지 서너 개는 부러지고, 세월의 흔적으로 인해 쇠약해지기까지 했던 정이품송이 완벽하게 복귀되었다. 정이품의 품계에 맞는 웅장함과 고귀함을 되찾은 것이다.
사진으로 많이 보기는 했는데, 솔직히 말해 직접 와서 보긴 처음이었다. 정확히 6개월 전, 정이품송은 지금의 모습을 되찾았다.
“…난 여기 가까운데 살면서도 되게 오랜만이야. 실제로 보니까 대단하다.”
가지가 부러진 곳에 인공적으로 가지를 덧심고, 썩어가는 나무 안에 약물을 투여했다. 첫 번째는 기술의 힘이었고, 두 번째는 관심의 힘이었다. 그렇지만 그 결과로 보자면 대단한 것이 아닐 수 없었다.
또한 속리산에 차가 다닐 수 없게 되자, 자연스럽게 도로가 없어지고 풀밭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죽어가던 나무를 되살린 가장 주된 요인이었다. 숨통을 틔워 준 것이다.
“진짜 명물이네, 명물이야. 예전엔 그렇게 못느꼈었는데.”
“다행이지, 죽기 전에 되살린게….”
“사진이라도 찍을까? 모여 봐!”
효진이 언니가 초소형 디카를 꺼내들었다. 그리고는 걸음을 뒤로하더니, 정이품송의 모습 그대로 카메라 안에 담았다. 그리고는 우리 셋이서, 또다시 추억이 될 만한 예쁜 단체사진을 찍었다.
보은판타지 (27)
열차가 달리는 철도를 제외한 정이품송 주위의 너른 들판은 온통 잔디로 덮인 푸른 초원이었다. 그 중앙의 커다란 소나무가 더욱 싱그러워 보였던 것은 어쩌면 그 때문일지도 몰랐다. 정이품송의 숨통을 조이고 있던 아스팔트가 모두 사라진 뒤, 그 자리를 대신한 잔디와 알록달록한 꽃들 덕분에 이곳의 경관은 눈에 띄게 아름다워진 것이다. 또한 커다란 가지를 복구해낸 과학 기술의 힘과 푸른 생명력을 불어넣은 자연의 힘의 적절한 조화 덕분에, 몇 년 전 까지만 해도 노쇠하기 이를 데 없었던 정이품송은 그 소중한 생명과 동시에 고고한 원추형의 자태까지 다시 되찾을 수 있었다.
들은 얘기지만, 정이품송이 잦은 폭우로 인해 큰 가지가 날아가고 속이 썩어가기 시작했을 땐 베어버리는 것이 낫다고 주장하는 사람들까지 있었다고 한다. 지금 생각해보아도 정말 슬픈 사실이다.
그 이름 하나만 해도 다른 나무들과는 달리 특별한 가치를 지닌 소나무인데….
이 커다란 나무가 ‘정이품송’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된 일화는, 속리산에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알고 있을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조금 먼 옛날, 세조 임금께서 나라를 다스리고 있을 즈음에, 왕은 심한 병고(종기)를 앓고 있었다. 이를 치료하기 위해 온천을 하려 그 길을 지나는데, 행차를 하던 도중 연가마에 가지가 걸릴 것 같자 염려했다. 그러자 정이품송이 가지를 위로 들어 왕을 지나가게 해주었고, 소나무의 충정을 기리려고 대감이상의 ‘정이품’ 품계를 내린 것이다.
그 이후로도 우산을 펼쳐놓은 단아하게 펼쳐놓은 듯한 고고하고 웅장한 자태와 특유의 신비스러움 덕분에 속리산을 방문하는 관광객들의 눈길을 사로잡았었다. 또한 무척이나 크고 오래된 나무로서 생물학적 가치도 무시할 수 없다 하고, 임금을 섬기는 그 당시의 시대상 역시 알 수 있는 문화적 산물이니 이렇게 되살려 놓은 것은 참 뿌듯한 일이다.
이곳을 현장학습 삼아 방문하는 학생들의 눈에도 확연히 담아놓을 수 있는 역사공부가 아닐 수 없다. 노란 교복을 입은 유치원생들의 모습을 보며,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뭐하냐?”
소희가 물었다. 뭐하긴 뭘해, 생각했지. 하지만 대답은 하지 않았다. 나는 가만히 웃기만 했다. 그러자 고개를 갸웃하던 소희는 가차 없이 고개를 돌리며 효진이 언니를 불렀다.
“언니! 얘 이상해!”
* * *
아까부터 정이품송에서부터 멀찍이 떨어져 가타부타 말이 없던 언니는 지극히 먼 산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이품송이 있는 자리 바로 맞은편, 그러니까 열차가 달리는 레일을 건넌 곳은 이국적인 테마파크가 자리한 곳이었다. 안 그래도 우리와 속리산을 둘러볼 시간이 마땅하지 않았던 언니는 은근히 둘러보고 싶어하면서도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언니, 뭐해?”
“응?”
“빨리 들어가자니까?”
“아, 그게….”
아까부터 언니를 지켜보고 있던 우리는 서로에게 눈을 찡긋해 보인 뒤, 언니의 양 쪽 팔을 홱 잡아끌었다. 시간이 없더라도 고민할 필요는 없지. 언니가 기껏 가보고 싶다는 곳인데….
“우와….”
나는 신이 나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오밀조밀한 돌조각으로 짜 맞추어진 길을 걷는 순간, 갑자기 풍경이 확 달라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그것은 아주 묘한 기분이었다.
연하게 푸른 것 같이 느껴지던 방금 정의 분위기와는 달리, 사방에 자리 잡은 푸른 나무들 사이에선 진한 녹음이 드리워져 있는 것만 같았다.
“예쁘지 않니?”
효진이 언니가 저 먼 곳을 가리켰다. 빨간 지붕을 쓰고 있는 하얀색 별장, 흡사 영화에서나 볼 것 같은 높게 솟은 첨탑. 그리고 빨간 우체통. 그 모든 것들이 푸른 나무들 사이로 드문드문 보였다. 깔끔한 별장의 모습덕분에 아주 짧은 해외 여행을 온 듯한 느낌이었다.
우리의 것과는 조금 다른, 희디 흰 페튜니아나 잎사귀들이 화사하게 피어난 이팝나무를 보면서 거리를 걷는 기분이란, 그저 걷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듯 했다.
조금 더 걷자, 음식점이 나타났다. 소희는 방금 회를 먹고 온 마당에 또 뭘 먹자는 거냐고 고개를 저었지만, 이번에는 나와 효진이언니가 무시를 하고 식탁을 끼고 있는 벤치로 소희를 데려갔다.
자리를 잡은 것이 행운이었다. 다른 곳에 비해 한적하긴 해도, 사람이 꽤나 붐볐던 것이다. 적어도 네 명은 앉을 수 있는 벤치와 식탁이 오십개도 넘었는데, 그 중 대부분이 자리가 있었다.
“와….”
꽤나 넓은 공터에 자리 잡은 음식점들과 사람들은 꼭 광장에 모여 있는 것 같았다. 쓰레기도 전혀 보이지 않았고, 여느 시내 한복판보다 훨씬 더 깔끔한 느낌이었다.
“여기도 건물하고 간판이 멋있다.”
“응?”
아, 그렇구나. 내 주위를 한 번 더 휘 둘러보자 비로소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원색이 강하고 글씨가 잡다해 지저분한 느낌이 물씬 풍기는 우리네 간판과는 달리, 은은한 색감을 풍기는 간판에 우아한 글씨체의 영문을 적어 넣었을 뿐인 이 곳 테마파크의 가게들은 확실히 깔끔하고 심플해보였다. 그렇게 느낀 것은 나 하나뿐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효진이 언니가 간식차 뭘 하나 먹어보자며, 음식을 가져오겠다고 자리를 떴다. 그 사이, 소희와 나는 주위를 정신없이 둘러보았다. 어느 곳 하나 눈길이 가지 않는 곳이 없었다.
5분 정도 지났을까. 효진이 언니가 커다란 쟁반을 들고 왔다. 그리고 식탁 위에 소스가 많이 뿌려진 소량의 스파게티 세 그릇과, 작은 샌드위치 세 조각. 또 생전 처음 보는 스낵같은 것을 작은 종지만한 그릇에 가득 담아왔다.
“이건 너무 많잖아!”
소희는 이게 무슨 후식이냐며 투덜댔다. 그러면서도 한 손으로는 나무젓가락을 집어 드는 것이다. 소희는 스파게티 그릇을 자기 앞에 놓으며, 보일 듯 말 듯 기대에 찬 표정을 지었다.
보은판타지 (28)
이곳을 다 둘러보는 것은 시간상 무리인 듯싶었다. 아무래도 저녁이 되기 전까지는 우리가 하룻밤 머물 숙소까지 걸어가야 했기 때문이었다. 생선이라기보다는 스낵에 가까운 요리를 열심히 깨작거리던 소희가 불만스럽다는 듯 말했다.
“꼭 이렇게 일찍 일어서야 해?”
“응.”
나는 대답해주었지만 효진이언니는 굳이 대답주진 않았다. 저게 자꾸…. 그래, 있으려면 여기 있던가. 우린 갈란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 말했다.
“얼른 가자!”
“야!”
소희는 5분이나 되는 시간 내내 툴툴거리며 우리의 발목을 붙잡아놓았다. 하지만 어쩔밖에, 이번에는 효진이 언니가 돌아서서 걸으려니 저도 어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 뒤를 졸졸 따랐다.
* * *
다시 정이품송이 있는 곳으로 걸어나오니 어쩐지 공기가 더 상쾌해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아까 음식점이 가득하던 그곳은 온통 익히고 굽고 타는 냄새로 가득해서 비교가 되는 건가. 하기야 깊은 산속이라고 해도 가스를 틀어놓았으니 거기가 도시라고 치면 여긴 시골이다. 단지 몇 걸음 차이일 뿐인데.
속리산의 공기가 서울보다 200배 정도 더 맑고 깨끗하다는 것은 알만한사람들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었다. 새삼 느끼는 거지만 어쩌면 그것은 정말 작고 단순한 차이 때문일지도 모른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있는 나를 효진이언니가 툭 건드렸다.
“희주야, 올라 타.”
“응? 응….”
나는 정이품송 바로 옆에 세워져 있던 자전거를 향해 한달음만에 달려갔다. 뒷좌석에 올라타니 몸이 축 늘어지는 듯 했다. 7시부터 정오를 넘어 오후 2시가 되기까지 걷기만 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내 옆에 쓰러지듯 올라탄 소희는 뒷좌석을 혼자 독점하기라도 하려는 듯 팔다리를 쭉 뻗고 드러누웠다. 소희의 머리가 내 무릎에 닿았다.
“힘들지? 조금만 참아. 조금 있다 한방병원에 갈 꺼거든.”
“한방병원? 우리가 거길 왜가?”
“보양식 먹으러. 아, 구경할 것도 많아.”
설마 한약을 먹는건가? 몸이 피곤해도 한약은 싫은데…. 내가 어렸을 때 딱 한 번 맛보았었던 한약은 지독히도 썼었다. 별로 달갑지는 않은 말에 나는 입맛을 다셨다.
자전거바퀴가 느리면서도 가파르게 굴러가기 시작했다. 조금 늦게 합류하긴 했어도 반나절 이상을 우리와 함께 걸어 다녔던 언니인데 이런 힘은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걸까. 조금 미안하긴 했어도 언니가 있어 다행이었다. 하지만 언니는 저녁 즈음에 다시 돌아가 봐야 할텐데. 그땐 어떡해야할까.
나는 좌석의 등받이에 등을 편하게 기댔다. 그러려다 왠지 코고는 듯한 소리가 낮게 들려오는 듯 해서 고개를 숙였다. 소희가 내 무릎을 베고 잠들어 있는 것이다. 얄밉긴 해도 차마 깨울 순 없었다.
자세가 자세이니만큼 밖을 내다볼 수는 없었는데, 향기가 배인 얇은 바람이 불어오는 것만은 확연히 느낄 수 있었다. 기분 좋은 꽃내음이었다.
나는 눈을 감았다. 순식간에 잠이 쏟아졌다. 앞에서 페달을 열심히 굴리는 효진이언니를 보면서 죄책감이 들기도 했지만, 정말이지 참을 수가 없는 졸음이었다….
* * *
“야? 야!”
“희주야, 얼른 일어나.”
시끄럽게…. 잠이 든지 채 5분도 지나지 않은 것 같은데 벌써 도착한 듯 싶었다. 나는 졸린 눈을 비비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야…. 벌써다왔어?”
눈앞이 흐릿했다. 나는 두 눈을 마구 비볐다. 주위의 건물들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빨리 내려.”
소희가 내 손을 잡고 힘껏 끌어당겼다. 그 때문에 하마터면 바닥에 코를 박고 넘어질 뻔 했다. 나는 넘어지지 않기 위해 펄쩍 뛰어 내려야만했다.
“야!”
소희는 화를 내는 나를 애써 무시하며 저 먼 산을 가리켰다. 그 때문에 나는 잠시 화내던 것을 멈추고 소희가 가리키는 방향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먼 곳이어서 그런지 흐리고 뿌옇게 보였다. 비단 눈 탓만은 아닌 듯 했다.
“우와!”
흐릿하게 보이던 것이 선명해지기 시작하면서 눈앞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 확인한 나는 소리를 빽 질렀다. 바로 문장대였다. 옛날엔 건물이 빼곡하고 주위에 자잘한 것들이 많아 잘 보이지 않던 문장대가 지금 이 먼 곳에서 바라보아도 전부 보일정도로 환하게 탁 트여있었다. 여러 봉우리들을 끼고 있는 문장대는 멀리서 보기에 웅장하기까지 했다. 문장대를 ‘신선이 그려놓은 하늘 자락의 병풍’이라 불리도록 바꾸어놓겠다고 속리산 발전 계획 때 누군가가 호언장담하는 말을 뉴스에 들은 적이 있다. 그 새로운 명칭이자 별명이 정말 잘 어울릴 정도로 모습이 바뀌었다.
주위 건물도 그랬다. 의류, 선물류, 기념품류, 필수품류, 그 외 각종 신기한 물건들까지…. 투명한 유리나 은빛 벽돌로 이루어져있어 보는 것만으로도 눈요기가 될 것 같은 고급스러운 건물이 가득했다. 특히 동화속에서 막 튀어나온 듯한 장난감 가게등은 아이들에게 있어 지대한 관심을 가지게 만들었다. 또한 예전에는 비슷한 종류의 음식을 파는 음식점들이 수두룩했는데, 그것도 한 두 곳으로 줄어 손님들이 몰리는 데 훨씬 더 실용적인 것 같았다. 게다가 음식의 종류가 무궁무진하기까지 했다. 답답한 도로와 도로 가운데에 있던 볼품없던 꽃밭이 사라지고, 그 대신 생겨난 넓은 길을 걷고 있는 사람들은 한번쯤은 가게나 주위를 한번 씩은 힐끔거렸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느 한 곳은 꼭 들어가 보곤 해 장사진을 이루었다. 그 중심에는 속리산의 특산물을 판매하는 마트가 있었다.
“여긴 되게 많이 변했다. 빼빼마른 가로수들도 다 없어졌어!”
“길 있는 자리에 마트가 생겼는데 어떻게 가로수가 있을 수 있냐. 이 바보야.”
“이게 또…. 아, 그런데 언니.”
“응?”
“우린 또 어디로 갈꺼야?”
“글세, 그거야….”
효진이 언니는 장난스러운 미소를 보여주었다. 그 표정으로 보아 한참 뜸을 들여 궁금하게 만든 다음에야 말해줄 것 같았다.
보은판타지 (29)
효진 언니가 이끄는 대로, 우리는 길을 따라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하지만 주위에 있는 휘황찬란한 가게들을 그대로 지나쳐 가는 일이 결코 쉬울 리 없었다. 참새가 방앗간 그냥 지나쳐가는 법 없다고, 적어도 소희와 나는 그랬다.
한 번만 들어가 보자고 조르는 우리에게, 효진이언니는 단호하게 경고했다.
“여기 있는 두 가게 중에 한 곳만 들어가도, 지금 너 네가 가지고 있는 돈은 다 쓰게 될 걸?”
설마 그럴 리가. 효진이언니 혼자 귀찮아서 그러는 거라고 생각했던 나는 효진이언니의 말에 강력히 반박하며 불만을 토로했다. 그러자 효진이언니 역시 그런 내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얼굴을 잔뜩 찡그렸다.
“너희들 적어도 속리산 여행하면서 하루 정도는 머물 생각하고 온 거 아니었어?”
소희와 나는 잠깐 동안 서로를 쳐다본 뒤, 효진이언니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응, 하루는 여기서 자려고 했어.”
“그럼 지금 가져온 돈이 얼마 남았는데?”
“…….”
나는 대답을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생각해보니, 주머니에는 이곳에서 하루 머물 숙박비와 식비, 그리고 그 외 용돈만으로도 빠듯한 돈이 남아있을 뿐이다. 만약 가게에 들어가 충동적으로라도 물건을 사게 되면 큰일이다. 그렇다고 효진이언니에게 돈을 빌릴 수도 없는 일 아닌가.
지금으로써는 식비만 해도 우리에겐 엄청난 돈이다. 또한 물건을 구경하다보면 쓸 데 없는 낭비벽이 도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학교에서 수련회를 다녀올 때만해도 매 번 그랬다.
나는 푸욱 한 숨을 내쉬었다.
“…나중에 다시 와 봐야지.”
결국 다음을 기약할 수밖에 없었다. 효진이언니가 그런 나를 바라보며 씨익 웃었다. 언니가 축 쳐진 우리의 어깨
를 손으로 짚고 꾸욱 눌렀다. 그러면서 한쪽 손으로는 내 손을, 다른 한쪽 손으로는 소희의 손을 꼭 붙잡았다.
“자, 이제 옆에는 그만 쳐다봐.”
“…….”
“여기서 조금만 더 걸어가면 나오는 데가 있는데…. 혹시 너희들, 오리숲이라고 알아?”
“…잘 모르겠는데.”
소희가 뚱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마도 삐진 모양이었다. 그런데 그 모습이 효진이언니의 입장에선 꽤나 귀여워보였나 보다. 언니는 소희의 짧은 머리를 마구 흩뜨려놓은 후에, 낭랑한 목소리로 ‘오리숲’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오리숲, 속리산 내의 휴식처이자 지름길인 작은 숲.
효진이언니가 설명하려는 속리산 오리숲은 지름길인 만큼 딱히 크거나 울창한 숲은 아니다. 그 거리가 고작 2km 내외이니 말이다. 그렇지만, 숲의 이름이 ‘오리숲’이 된 이유가 바로 여기, 이 숲의 거리에 있다.
옛날이야기에서나 나오곤 하는 거리 단위가 있다. 바로 ‘리’라는 것이다. 주로 ‘십 리’라는 말이 우리 귀에 익숙한데, 이 십 리가 요즈음 우리가 쓰는 km 단위로 바꿔보면 4km가 된다. 오리숲의 거리가 2km, 십 리의 절반인 오 리가 2km가 되니, 이것이 바로 숲의 이름으로 붙여졌다.
간혹 몇몇 사람들은 오리숲의 오리라는 말과 관련지어 궁금해 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 오리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것이다.
오리숲은 속리산의 휴식처쯤으로, 넓은 공터에 마련된 벤치에 앉아 새소리를 듣거나 푸른 숲의 경치를 구경하며 걷는 분들이 많다. 이렇듯 많은 사람들이 가벼운 산책로쯤으로 여기곤 하는데, 이래봬도 ‘신선도[神仙圖]’ 운장대와 바로 맞닿은 유일무이한 곳이 바로 오리숲이라 한다. 또한 우리나라에 있어 수많은 절들 가운데에서도 커다랗기로 손꼽을만한 법주사와 직통이 가능해 앞서 말한 속리산의 지름길의 기능도 가진 셈이다.
이러한 오리숲은 주로 책자에 ‘작은 고추가 더 뜬다.’ 라는 재미있는 여행 트렌드로 단독 소개되는 경우가 많다. 웬만한 큰 숲보다도 찾는 사람이 많다는 뜻에서다. 그것이 비록 속리산때문이라고 해도 말이다.
작은 일화지만 오리숲에는 그에 얽힌 무서운 이야기도 있다고 한다. 옛날 이 곳을 지배했던 왕들이 나라에 큰 죄를 지은 죄인이 있다면 바로 이곳에서 벌을 내렸다는 것이다. 그 당시까지만 해도 워낙에 숲이 빽빽하고 좁아 사람을 가두기엔 안성맞춤이었는데, 거기에 사자까지 풀어 죄인과 함께 가두었다는 것이다. 그 곳에 갖힌 죄인들은 사자를 피하며 언제 닥칠지 모르는 죽음을 두려워해야만 했다고 한다.
“…그거 의외로 참 무서운 얘기네.”
어느새 뚱했던 표정이 풀어지고, 효진이언니가 하는 얘기에만 가만히 귀를 기울이고 있던 소희가 한마디 했다. 나도 같은 생각이라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야기를 끝낸 효진이언니가 가볍게 웃으며 우리에게 물었다.
“가보고 싶지?”
“응!”
나와 소희는 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까의 일은 금세 잊어버리고, 호기심이 동한 것이었다.
하지만…
“근데 지금은 안돼.”
…마치 일부러 놀리는 듯, 효진이언니가 장난스럽게 엄한 목소리를 흉내 내며 말했다. 우리는 입을 헤 벌리고 멍청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왜?”
“저쪽 공원으로 돌아서 갈 거거든. …어쨌든 조금만 걸으면 갈 수 있으니까 그런 표정 짓지는 마.”
효진이언니가 급하게 실망하는 우리를 보고 꽤나 당황했나 보다. 우리의 손을 놓은 채, 갑자기 빨리 걷기 시작했던 언니는 조금 먼발치에 떨어졌을 때 어서 오라는 듯 천천히 손짓했다.
마치 처음부터 거기서 기다리고 있었던 사람처럼.
보은환타지(30) 2007-09-21 08:04:07
이야기를 끝낸 효진이언니가 가볍게 웃으며 우리에게 물었다.
“가보고 싶지?”
“응!”
나와 소희는 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까의 일은 금세 잊어버리고, 호기심이 동한 것이었다.
하지만…
“근데 지금은 안돼.”
…마치 일부러 놀리는 듯, 효진이언니가 장난스럽게 엄한 목소리를 흉내 내며 말했다. 우리는 입을 헤 벌리고 멍청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왜?”
“저쪽 공원으로 돌아서 갈 거거든. …어쨌든 조금만 걸으면 갈 수 있으니까 그런 표정 짓지는 마.”
효진이 언니가 급하게 실망하는 우리를 보고 꽤나 당황했나 보다. 우리의 손을 놓은 채, 갑자기 빨리 걷기 시작했던 언니는 조금 먼발치에 떨어졌을 때 어서 오라는 듯 천천히 손짓했다.
마치 처음부터 거기서 기다리고 있었던 사람처럼...
주위에는 작고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미니 공원이 많았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는 꼭 분수 하나씩이 자리 잡고 있었는데, 굉장히 독특한 모양으로 조각되어 있는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분수의 틀인 미끌미끌한 대리석은 속리산의 마스코트 모양대로 조각된 것도 있었고, 구불구불하게 휘어진 말티재 길(길 모양의 분수 위로 굵은 물줄기가 흘렀다)모양대로 조각된 것도 있었다. 하나같이 속리산을 상징하고 있는 상징물들이었다.
그런데, 가장 먼저 내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그런 것들뿐만이 아니었다.
커다란 분수 주위에 연방 탄성을 질러대는 사람들이 모여 있기에, 효진이언니와 나, 그리고 소희는 가는 길을 접고 잠시 그 틈으로 끼어들었다. 멀리서 보기에도 한 눈에 확 들어오는 것이, 보는 이로 하여금 정체를 궁금하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냥 멀리서 보았을 때, 그 분수는 다른 조각 분수들보다 조금 덜 화려하고(커다란 돌벽이 둘러싸고 있는 호수모양이었다) 조금 더 크기가 크다는 것 외에는 딱히 눈에 뜨일만한 구석이 없는 듯 했다. 하지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서, 그 모양을 정확히 보게 되었을 때는 ‘아!’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때문에 소희와 효진이언니의 손을 깜빡 놓친 것 마저 느끼지 못할 정도였다.
말티재를 지나기에 앞서 보았던 커다란 호수가 떠올랐다. 허공을 화려하게 수놓았던 분수의 물줄기들도 마찬가지였다. 그 큰 호수와 분수의 모양, 배치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섬세함이라니. 감탄소리가 절로 나올 정도였다.
이를테면 복습효과인 셈이었다. 앞서 보았던 장관을 다시 기억할 때 즈음에는 눈앞에 선연히 보인다고 느껴질 정도였으니까.
아마 같은 사이즈의 사진으로 찍어놓는다면, 어떤 사람이든 쉽게 구별하진 못할 것이다.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카메라를 꺼내든 나는 그 모습을 사진 속에 담아놓았다. 소희가 찍어놓은 호수사진과 비교해보기 위해서였다.
그 뒤로 사람들 틈에서 조용히 빠져나온 나는 소희와 효진이언니를 찾기 시작했다. 무리에 갑자기 섞인 틈에 깜빡 잃고 말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입을 헤 벌리고 분수를 구경하고 있는 소희부터 찾아내, 조심스럽게 다가가 말했다.
“야, 가자.”
“조금만 더 있다….”
“조금만은 무슨. 빨리 가야돼. 얼른 언니나 찾아.”
“…….”
소희의 얼굴이 금세 또 부루퉁해졌다. 얼굴에 대놓고 드러내는 표정에 나 역시 짜증이나 얼굴을 찌푸리며 생각했다.
니가 애냐. 맨날 삐지게.
심통이라도 단단히 났는지, 발도장을 꽉꽉 찍으며 걸어가는 소희를 거의 업어 걷다시피 해야했다. 그러다가 효진이 언니를 찾아냈다. 간신히 찾아낸 효진이언니는 사진작가라도 된 것 마냥 여러 각도로 돌아가면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완전히 심취해버린 듯한 얼굴이었다.
…지금 뭐하는 짓이래, 저게.
“언니!”
워낙 큰 목소리를 낸 터라 주위의 시선이 온통 나만을 향했다. 이게 아닌데.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소희가 뒤에서 뭐라고 궁시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 때문에 자기까지 창피해졌다고 투덜거리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결국 한참이 지났다.
사람들의 시선이 다시 거두어졌을 즈음에, 효진이언니가 고개를 돌렸다. 그러면서 우리 쪽을 보더니, 갑자기 깜짝 놀라는 것이다. 언니가 걸음을 옮겨 황급히 우리쪽으로 다가왔다.
“여기 있었구나…. 미안해, 언니가 사진을 찍느라 정신이 없어서.”
“또 보고서 때문이구나?”
효진이 언니가 씨익 웃었다. 분명 그렇다는 뜻일 것이다. 그렇지만 뭐라고 할 수도 없는 입장이지 않은가. 전적으로 효진이언니 덕분에 이렇게 편하게 여행하고 있는거니까. 아마도, 내가 소희처럼 부루퉁 거리는 일은 절대 없을 것 같다. 나는 효진이언니의 한쪽 손을 꼭 쥐고 말했다.
“가야지!”
“어딜?”
“오리숲!”
효진이 언니가 잠시 동안 어리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정말 잠시였다. 얼굴이 온통 환해지면서 밝게 웃는 것이다.
“아…. 그래!”
결국 결론은 났다. 하지만….
절대 못 걷겠다고 뻐기는 소희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벤치에 앉아야만 했다. 다리에 무리가 가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몸이 뻐근한 것도 아니었던 나는 시간이 지체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효진이언니가 찍어 놓은 사진을 보는 순간, 그런 마음 따위는 봄눈 녹듯 사라지고 말았다.
“…우와!”
나는 사진의 절묘함에 입을 딱 벌릴 수밖에 없었다. 8개의 꼬마분수에서 내뿜은 8개의 물줄기가 허공을 수놓으며 정확히 별표를 나타낼 때, 가운데에 있는 왕 분수에 물줄기가 회오리모양으로 물을 뿜어 하트 모양을 만들어 낼 때. 그 매 순간순간이 찰칵찰칵 사진에 찍힌 것이다. 도대체 이런 순간마다 어떻게 눈치 채고 찍은 건지. 효진이언니의 사진에 비해 형편없기만 한 내 사진을 보며 물었다.
“사진을 잘 찍는 비법은?”
“그거야 당연히….”
“당연히?”
“…감이지.”
효진이 언니가 살짝 웃으며 카메라를 쓰다듬었다. 그 말이 진심인지 아닌지는 알 길이 없지만, 얼굴로 봐서는 정말 진지하게 말하는 것 같기도 했다. 아니, 어쩌면 기분이 좋아하는 표정을 내가 그렇게 읽은 것일지도 모른다.
<다음호 계속>
보은판타지 31 글.그림: 김동은(보은여중1)
저 끝자락으로 어물어물한 초록빛이 비쳤다. 지금까지 지나왔던 그 어떤 곳보다 더 울창한 푸른 숲이었다. 분명 작은 숲이라 했는데, 직접 보니 그것도 아닌 것 같았다.
그렇지만 휴식처는 맞았다. 줄지어 늘어서있는 푸른 나무들 가운데의 수많은 벤치는 주로 노인분들을 위한 것이었는데, 해바라기를 하시면서 담소를 나누시는 그 분들의 얼굴에는 즐거운 미소가 가득 떠올라 있었다. 여기저시서 흐르는 새 지저귐 소리나 다소 쌀쌀한 날씨에 몸을 따스하게 만들어주는, 울창한 나무 사이로 부드럽게 스미는 기분 좋은 햇빛이 있으니, 웃음 짓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이렇듯 평화롭고 즐거운 분위기의 오리숲을 배경으로 풍경화를 그리는 사람들도 여럿 보였다. 소풍 온 초등학생부터 전문적으로 그림을 그리고 있는 어른들까지,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장소가 따로 마련되어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조그만 연못 위로 귀엽게 꾸며진 다리를 건넜다. 그리고 나서 왼쪽을 돌아보니, 표를 파는 매표소가 보였다. 작은 통나무집이었다. 그런데 뭔가 또 이상했나보다. 소희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오리숲 입장은 무료잖아. 매표소가 왜 있어?”
“……?”
즉시 대답하려던 효진이 언니가 할 말을 잃었는지 소희를 빤히 바라보았다. 굉장히 황당한 질물을 받았다는 듯, 어이가 없어하는 표정이었다. 소희는 즉시 반박했다.
“왜 그런 표정을 짓는거야!”
“…너 진짜 몰라?”
“뭐가?”
“오리숲 경전철.”
소희가 대답하기 전에 약간 뜸을 들였다. 정말 잘 모르고 있는 모양이었다. 꽤나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는 듯한 소희의 얼굴에, 효진이언니가 작게 미소를 지었다. 그러면서도 꽤나 곤란해 하는 듯한 모양새였다.
“일단 표부터 받아올게.”
…대답하기 힘든 질문 때문에 급하게 도망치려 효진이언니는, 줄이 길게 늘어져있는 매표소를 보고 ‘아차’하며 그곳을 향해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효진이언니가 자리를 뜨자마자, 인상을 잔뜩 찡그리고 있던 소희가 나를 툭툭 치며 물었다.
“야, 나 그거 들어 보긴 했는데 뭔지 잘 모르겠어.”
“…그럼 조금 있다가 봐.”
리프트나 청룡열차는 알면서 경전철은 모르다니, 이래봬도 팜플렛 제일 앞면에 best 추천 속리산 명소에 꼽혀 있는 곳이다. 받기만 하고 영 읽어보지는 않았나보다. 왠지, 아까부터 나한테만 떠넘기더라니.
그러고 보니, 중반에 효진이 언니와 합류하게 된 것은 정말 행운이었던 것 같다. 언니가 아니었다면 나 혼자 소희를 데리고 다니며 설명해 주기도 참 힘들었을 것이다. 새삼 효진이언니에 대해 고마움을 느끼게 되었다.
조금 시간이 지났을 즈음이었다. 저 멀리로 효진이언니가 뛰어오는 것이 보였다. 샛노란 종이 석 장을 손에 꽉 쥔 채로 맑게 웃고 있었다. 마치 여섯 살 난 어린아이처럼. 물론 좋은 의미로 말이다.
“표를 생각보다 일찍 구했어. 얼른 가자!”
털썩 주저앉아 있던 나를 효진이언니가 일으켜주었고, 뭔가 고민하는 듯 했던 소희는 제 스스로 일어서 뒤를 따랐다.
천천히 걸어 진짜 오리숲에 들어선 우리는, 맑고 상쾌하기 그지없는 이 곳 공기 덕분에 기분 좋은 탄성을 흘렸다.
몸의 피로가 싹 가실만한 시원한 바람까지, 우리를 기분 좋게 맞아주었던 것이다.
그리고 저 멀리로 히끄무레한게 보였다. 바로 경전철이었다. 우리는 좀 더 서둘러 걸었다. 우리 뒤에서 단 한 마디 가만히 걷기만 하던 소희는, 경전철을 타는 곳으로 거의 가까워졌을 즈음에야 말문을 열었다.
“효진이언니.”
“응?”
“저기에 있는 경전철 말고, 그냥 경전철이 정확히 뭘 말하는거야?”
“응? …아.”
드디어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이 나와서 그런지, 효진이언니의 얼굴이 다시 밝게 펴졌다. 걸음을 빨리하고 있던 언니는 갑자기 그 속도를 늦추며 천천히 걸었다. 그러면서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는 듯 했다. 조금의 시간이 지났을까. 효진이 언니는, 아까의 목소리와는 비교도 안 되는 ‘똑 부러지는’ 목소리로 설명을 시작했다.
사실, 속리산의 경전철은 진짜 경전철과는 그 모습이 많이 다르다고 한다. 본래 ‘경전철’이란 지하철도와 같은 중전철(重電鐵)과 반대되는 가벼운 전기철도라는 뜻으로, 지하철도와 대중버스의 중간 정도의 수송능력을 갖춘 대중교통수단을 이르는 말이다.
속리산과는 사용하는 의도가 많이 다르긴 해도, 유럽·일본 등지에선 이미 대중교통수단으로 자리 잡아 부상하고 있는 것이 경전철이다. 건설비가 싸고 관리비가 저렴하며, 그 기능 또한 관광기구로는 손색이 없어 선택받기에는 충분하기 때문이었다. 경전철에는 소형전철·모노레일·궤도버스, 그리고 앞서 말한 자기부상열차 등의 종류가 포함되는데, 속리산의 경전철에서는 가릴 것 없이 그 모두가 이용 된다.
또한 아무리 작다 해도 명색이 운송수단열차인데, 사람을 태우는 관광수단만으로 이용한 것 역시 속리산만의 파격적인 방법이었다. 물론, 그 결과가 대박이었기에 이렇게 까지 유명해질 수 있었던 것이기도 했다.
<다음호 계속>
보은환타지(32) 2007-10-12 09:31:43
글.그림 김동은(보은여중 1)
‘성공했다.’ 참 대단한 말이다. 또한 쉽게 쓰이지도 않는다. 그렇지만 여기 와선 그 말을 참 많이도 들었다. 그것은 바로 내 눈 앞에 있는 오리숲 경전철만 해도 해당되는 말이다.
“…하기사.”
숲에 경전철을 놓을 생각을 쉽게 할 수 있을 리 없다. 길도 곧지 않은 곳에 운송수단을 놓다니. 꼬불꼬불한 길 위에서 움직일 수 있게 하는 것은 간단한 기능성 강화만으로도 해결된 문제지만, 만들어졌을 당시만 해도 무모한 일이었다. 하기야, 그러한 위험을 감수했는데 성공하지 않았으면 오히려 억울한 일이었을 테지.
어쨌거나, 그러한 도전덕분에 이 특별한 관광수단이 탄생하게 됐다.
‘새로움’외에도 이 경전철이 가지고 있는 키포인트는 다양하다. 비가와도 운행이 가능하지만, 구경할 수 있는 시야는 결코 좁지 않게끔 해야 했던 이 경전철은 구조 역시 특이했던 것이다. 매끄러운 빛이 흐르는 검은 밑바닥을 제외한 몸통을 온통 통유리로 덮었다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 경전철 안의 붉은 좌석이 그대로 비칠 정도로 투명해, 밖에서 보는 그것은 아름답기까지 하다고 한다. 울창한 나무사이로 비치는 햇빛이 유리표면을 눈부시도록 반짝이게 할 때 말이다.
헬리콥터를 타고 속리산을 구경하는 특이한 관광을 하는 사람들의 눈에, 오리숲 속에서 움직이는 그것이 ‘은빛 뱀’으로 보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나 역시 그것을 처음 보았을 때는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무엇보다 예뻤으니까.
“탈껀가?”
경전철의 근처에 다다라 가만히 서 있던 우리에게(나는 입을 헤 벌리고 구경에만 열중해 있었다), 경전철의 맨 앞자리에 앉아있던 늙은 할아버지 한 분이 다정스레 물으셨다. 표를 도대체 어디에 넣어야 할지 헤매던 효진이언니가 그 목소리에 퍼뜩 놀라 고개를 들었다. 경전철을 운전하는 사람이 따로 있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나보다. 효진이언니뿐만이 아니라 나와 소희도 마찬가지였다. 처음 할아버지를 보았을 때, 우리와 같이 경전철을 타려는 사람인 줄만 알았던 것이다.
효진이언니가 주머니 속에 구겨 넣었던 노란색 종이 석 장을 황급히 꺼내, 통유리에 뚫려 있는 동그란 구멍에 손을 넣어 할아버지 앞으로 내밀었다.
“청소년 둘에 성인 하나요.”
아주 잠깐 동안 표를 살피시던 할아버지가 됐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시다가, 가만히 손을 들어 뒷자리를 가리켰다.
“저기 26번 자리에 앉으면 될거야. 가만…. 그런데 일행이 세 명뿐인가?”
“네, 그런데 그건 왜요?”
“한 좌석에 두 명씩 앉아야 하거든. 한 명은 따로 앉아야겠는데….”
물론 통유리 속으로 보이는 좌석은 할아버지 말 그대로였다. 청룡열차와는 조금 다른 구조지만, 뱀처럼 길게 늘어서있는 경전철은 총 40좌석으로, 한 번 운행 당 80명씩이 앉을 수 있었다. 당황하는 우리를 보며 할아버지가 인자하게 웃으셨다.
“낯선 사람하고 앉기가 싫은가 보구나. 어린친구들이니 그럴 만도 하지.”
“…네.”
“잠깐 기다려보렴.”
할아버지가 운전석에 붙어있는 작은 모니터를 살피셨다. 얼핏 보이는 것은 하얀색 바탕에 노란색 점 대여섯개 뿐이었다. 이윽고 할아버지께서 말씀하셨다.
“맨 끝자리라면 셋이서 두 좌석을 차지해도 될 것 같구나. 그렇게 하겠니?”
“…네? 아, 네!”
효진이 언니가 꾸벅 인사했다. 할아버지가 검은색 칩 두 개를 건네셨는데, 끝자리 두 좌석의 문 바깥에 그것을 끼우면 문이 열릴 거라고 하셨다. 그러니까, 사용하는 사람은 단 한 번밖에 쓰지 못하는 일회용 열쇠 같은 거였다.
“빨리 뛰자!”
전철의 처음부터 끝까지의 거리가 상당히 멀었다. 출발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기에 우리는 서둘러 뛰었다.
끝에 도착하자마자 숨이 끊어지는 것 마냥 소희와 내가 꺽꺽댔다. 하지만 효진이언니는 얼른 검은색 그것을 집어넣고, 문이 열리길 기다리며 말했다.
“너랑 소희랑 앉으면 되겠다.”
“응? 그럼 언니는?”
“난 너희들 바로 뒤에 앉으면 되지 뭐. 자, 얼른 타!”
쿵-
소리가 요란했다. 소희가 부리에 걸려 넘어진 것이다. 사람들의 시선이 죄 이쪽을 향했다. 하여튼, 창피할 짓을 골라서 하는 것도 재주는 재주였다.
보은환타지 (33) 2007-10-12 09:32:51
글. 그림: 김동은(보은여중 1)
“응? 그럼 언니는?”
“난 너희들 바로 뒤에 앉으면 되지 뭐. 자, 얼른 타!”
쿵-
소리가 요란했다. 소희가 부리에 걸려 넘어진 것이다. 사람들의 시선이 죄 이쪽을 향했다. 하여튼, 창피할 짓을 골라서 하는 것도 재주는 재주였다.
기차가 천천히 출발했다. 내가 앉아있던 의자가 조금 덜덜거렸다는 것만 제외하면, 움직이는 것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할 만큼 유연했다. 속도 역시 빠르지도 않고 느리지도 않았다.
게다가 몸이 둥둥 떠 있는 듯한 느낌도 들었다. 바퀴가 붙어있는 바닥을 제외한 삼면이 모두 유리로 만들어진 까닭이었다. 뭐랄까, 나는 움직이지 않는데 사방이 움직이고 있으니 굉장히 묘한 느낌이었다.
나는 뒷좌석에 앉아있던 효진이언니를 보기 위해 고개를 빼꼼히 내밀었다.
“효진이언니.”
“응?”
“이거 타니까 기분이 되게 이상하다.”
“처음 타보는 거니까. 괜찮아, 금방 익숙해져.”
“음…. 그런가?”
“아차, 너한테 줄 거 있었는데.”
효진이 언니가 등에 메고 있던 커다란 가방을 뒤적이더니, 커다란 과자 한 봉지를 꺼냈다. 휴게소를 지날 때 사 온 모양이다. 과자 봉지의 가운데를 손으로 찢어 크게 벌려 놓은 효진이언니가 그것을 조심스럽게 내밀었다.
“자, 소희랑 같이 먹어.”
“응? 언니는?”
“언니는 여기 작은 거 있어.”
언니가 다시 가방을 뒤적였다. 이번에는 이온음료 두 개였다.
“목마르면 마시고. 난 물 있어.”
내심 좋았던 나는 헤벌쭉 웃으면서 그것을 받아들었다. 커다란 과자는 소희의 무릎 위에 올려 두었고, 이온음료는 앞사람 의자에 달린 고리에 올려놓았다.
과자를 먹으면서 창밖을 열심히 내다보았다. 그렇게 있으니 어디선가 바람 한줄기가 불어와 얼굴을 간질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얇은 유리 창문은 열어놓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바깥 풍경 때문일까. 기분 탓일까. 아마도 둘 다 일 듯 했다.
천천히 움직이고 있는 기차 옆으로는 사람들이 걷고 있었다. 편한 것을 마다하고 이 곳 오르는 것을 되려 즐기려하는 사람들일 것이다. 나중에 다시 왔을 땐, 나도 이곳을 꼭 걸어서 올라가보고 싶다.
“소희야.”
“왜?”
한 손에 쥔 과자를 입 안에 모두 쑤셔 넣었던 소희가 이상한 발음으로 되물었다. 조금씩 먹지. 하여간….
“야, 우리 지금 문장대 가는 길이지?”
“그래, 왜? 그것도 몰랐냐?”
이게. 같이 나눠먹어야 할 과자 지 혼자 다 먹어놓고서 하는 말 좀 봐라. 소희는 자기 음료수를 꿀꺽꿀꺽 마시고 내 음료수에까지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눈치 챈 나는 행여나 음료수를 뺏길까 재빨리 집어 들었다.
창밖으로는 이제 계곡이 보였다. 물빛이 참 맑기도 하다. 물이 퐁퐁 솟아오르거나 철철 흘러넘치는 소리 역시 상쾌했다.
아, 잠깐.
“소희야.”
“왜?”
“너 밖에 바람소리 들리니?”
“당연히 들리지.”
“…그게 어떻게 들리는 거지?”
“갑자기 무슨 소리야?”
“유리 너머로 소리가 들리잖아.”
창문에 귀를 가까이 대보았다. 소리가 더 확연하게 들렸다. 우와, 이건 뭐지? 신기한 유리창이었다.
“효진이 언니!”
“응?”
“이 유리창은 뭐야?”
“응? 아, 이건….”
효진이언니가 잠깐 뜸을 들이는가 싶더니, 곧이어 대답했다.
“아닐 수도 있지만…. 아무래도 유리창에 작은 구멍이 많이 뚫려있는 것 같아. 자세히 보면 찾을 수 있을거야.”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창을 관찰했다. 확실히… 아주 조그마한 구멍들이 여러 개 뚫려있었다. 기발한 아이디어다. 이것 때문에 작게나마 소리가 들리는 거구나.
나는 등받이 의자에 편안하게 기대 숲 사이를 흐르는 바람소리를 감상했다.
보은환타지(34)
나는 언니의 가방에서 검은색 봉지를 꺼내 쓰레기를 주워 담았다. 원래 놓고 가기만 해도 이쪽에서 치워주는데, 어쩔 수 없이 내가 챙겨야만 했던 이유는 바로 소희에게 있다.
조금 전 음료수를 다 마신 소희가 빈 캔을 창문 밖으로 휙 던져버렸다. (창문에 구멍이 뚫려 있어 별 필요 없기야 하지만 문을 열 수 있다.) 그런데 그것이 하필이면 기관사 아저씨의 눈에 딱 걸리고 만 것이다.(사실 걸리고 안 걸리고의 문제가 아니라 쓰레기를 버린 것 자체가 잘못된 행동이지만.)
그렇지만 기관사 아저씨께서는 별 말씀 없이, 우리가 지저분하게 만든 자리를 깨끗이 치우라고만 하셨다.
…쉬운 일이었지만 참 이상하게도 그 일은 소희가 아닌 내 차지가 되었다.
나는 쓰레기를 주우면서 소희를 노려봤지만, 소희는 전혀 미안하단 표정이 아니었다. 고작 음료수의 마지막 한 입을 내가 마셨다는 이유로 뒤처리를 내가 해야만 한다니, 억울했다. 하지만 효진이언니가 소희의 말을 듣고 정당화시켰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열차 안에 있는 미니 청소도구함으로 먼지까지 쓸어내야만 했다.
내 자리까지 발을 뻗고 거만하게 드러누워 있던 소희가 주위를 휘- 둘러보더니 만족스럽다는 듯 말했다.
“와, 우리 자리가 제일 깨끗해졌을 것 같다. 청소는 그나마 잘 하는 일인가 보네?”
“그거 칭찬이지?”
“당연하지.”
으, 욕 맞으면서. 빨갛게 달아오른 내 얼굴을 보고 생글생글 웃는 꼴이 얄밉다. 그렇지만 지금은 가만히 있을 수 밖에. 하지만 문장대에 오르기 전까지는 꼭 복수해주고 말테다.
나는 뭐라고 한마디 하려고 입을 열었다.
“이 나쁜….”
“곧 세심정에 다다를 꺼야.”
조용한 뒷자리에 앉아 느긋한 자세로 책 [걸어서 문장대까지 오르기를]을 읽고 있던 효진이언니가 내 말을 잘랐다. 험한 말이 나올 것을 미리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나와 눈이 마주치자 상냥한 미소를 보여주는 언니였지만, 아까의 일 때문인지 효진이언니의 얼굴조차 밉게만 보였다.
그렇게 10분이 흘렀다. 삐져 있는 나와 달리 나머지 둘은 여유롭기만 했다. 얇은 스피커에 나지막한 목소리가 울린 것이 바로 그때였다.
[세심정, 세심정에 도착했습니다. 이 뒤로는 열차를 돌립니다. 내려주십시오. 세심정, 세심정에 도착했습니다….]
“아, 도착했다.”
효진이언니가 긴 가방끈을 어깨에 둘러맸고, 나와 소희는 작은 배낭가방을 열심히 챙겼다. 그러고 난 뒤에 문을 연 나는 바로 나가려 했지만, 효진이언니는 규칙을 지켜 나가야지 다치지 않는다며 기다리라했다.
가장 마지막으로 내린 우리는 효진이 언니의 말대로 사람들 사이에 부대끼지 않고 안전하게 내릴 수 있었다. 나는 셋 중에서도 가장 먼저 내려 문장대의 맑디 맑은 청정공기를 흠뻑 들이켰다. 확실히 열차 안에서 조금씩 조금씩 쐬던 것과는 다른 느낌이 들어 기분이 좋았다.
바로 눈 앞에는 세심정이 있었다. 우와-, 하는 소리가 저절로 나올 정도로, 정말 깨끗하고 맑은 물이 흐르고 있었다.
“…예쁘다.”
“응, 진짜 예쁘다.”
세상의 속세를 씻어내는 맑은 물이라 불리는 것처럼, 세심정의 물은 맑았고 흐르는 소리는 청아했다. 또한 보기에도 즐거운 볼거리였다. 푸르게 자란 나무들 사이로는 언뜻 정자들이 비치는 듯 했다.
마음을 씻어내는 물 세심정. 혹시나 모르는 사람이 있다면, 여기서 분명 짚고 넘어가야 한다.
세심정(洗心亭).
물과는 관련이 적어보이는 한자의 이름이라 모르는 사람에게는 다소 의아할 법도 하다.
첫 번째의 세(洗)는 ‘깨끗하게 씻는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씻을 세자다. 이는 세심정의 물과 가장 관련 있는 한자다. 두 번째 심(心)자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심장 모양을 나타내는 마음 심자다. 마지막으로 정(亭)자는 정각, 정자 등을 말할 때의 정인 것이다.
세심정은 문장대의 길이 두 갈래로 나뉘는 곳에 자리 잡고 있는데, 이름과 같이 학문을 닦는 사람들이 찾아와 초심을 새로이 다짐하는 곳이다. ‘세심洗心.’ 그 맑은 물에 자기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보고 마음을 닦았던 것이다. 즉, 세심정은 옛날 옛적 가끔씩 공부하기 힘들었던 학동들의 마음의 샘터였던 셈이다.
그러나 이들은 단순히 세심정에 얼굴을 비치고 돌아가는 것만으로는 끝나지 않았다. 이곳에 들렀던 사람들은 자신의 일을 되돌이켜 반성하고 새로운 마음을 머금었으며, 그것을 다짐하는 뜻으로 물가 근처 바위에 ‘세심대’라는 글을 항상 새기고 갔다. 지금에 와서 그 글씨를 찾아볼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지금은 울타리가 놓여지고, 다리가 놓여 세심정의 물에 손을 담그고 발을 담글 수는 없을 것이다. 바위에 글을 남기고 새로운 마음으로 다짐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보면 볼수록 신비스럽고 들으면 들을수록 맑고 청아한 세심정을 가만히 보고 있노라면 분명 옛날 사람들이 느꼈던 속세의 씻김을 우리 역시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상으로 세심정의 대한 설명을 마칠 수 있겠다.
“그런데 어쩌지?”
가만히 물 구경에만 심취해 있던 우리를 효진이언니의 목소리가 깨워냈다. 나는 효진이언니를 돌아보았다. 언니는 시계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문장대에 오르려면 시간이 많이 걸릴텐데….”
“…아차, 언니는 돌아가봐야 한댔지?”
“아니, 막상 너희들 보니까 나 혼자 가기도 그렇구. 그냥 있을까 생각중인데….”
“앗, 정말?”
나와 소희가 동시에 소리쳤다. 살짝 고개를 끄덕인 효진이언니가 우리에게 물었다.
“너희들, 오늘은 여기서 자고 갈 거라 했지?”
“응.”
“문제는 시간이 별로 없다는거야. 문장대에 올라갔다 내려온 뒤에도 조금 쉬어야 할 거고, 아직 볼거리도 많이 남아있으니까….”
“빨리 올라가야 하는거야?”
“그렇긴한데. 언니는 괜찮아도 너희들 체력이 받쳐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이래봬도 저 끝까지 올라가는 거, 지금 상태로는 힘들꺼야.”
“괜찮아!”
나보다도 소희가 먼저 대답했다. 그리고는 문장대로 오르는 높은 왼쪽 길목으로 냅다 달리는 것이다. 조금 멀리까지 뛰어 간 소희는, 얼른 오라는 듯 저 멀리서 손을 흔들었다.
보은환타지(35) 2007-11-02 09:38:55
세심정은 문장대의 길이 두 갈래로 나뉘는 곳에 자리 잡고 있는데, 이름과 같이 학문을 닦는 사람들이 찾아와 초심을 새로이 다짐하는 곳이다. ‘세심洗心.’ 맑은 물에 자기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고 자신의 마음을 닦는 일을 이른다. 즉, 세심정은 옛날 옛적 가끔씩 공부하기 힘들었던 학동들의 마음의 샘터였던 셈이다.
그러나 이들은 단순히 세심정에 얼굴을 비치고 돌아가는 것만으로는 끝나지 않았다. 이곳에 들렀던 사람들은 자신의 일을 되돌이켜 반성하고 새로운 마음을 머금었으며, 그것을 다짐하는 뜻으로 물가 근처 바위에 ‘세심대’라는 글을 항상 새기고 갔다. 지금에 와서 그 글자를 찾아볼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지금은 울타리가 놓여지고, 다리가 놓여 세심정의 물에 손을 담그고 발을 담글 수는 없다. 바위에 글을 남기고 새로운 마음으로 다짐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 맑은 세심정의 물은 그저 가만히 보고 있기만 해도, 그 옛날 사람들이 느꼈던 속세의 씻김은 우리 역시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어쩌지?”
멍하니 넋을 빼놓고 있던 우리는 효진이언니의 목소리 덕분에 정신을 차렸다. 나는 효진이언니를 돌아보았다. 언니는 시계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문장대에 오르려면 시간이 많이 걸릴텐데….”
“…아차, 언니는 돌아가봐야 한댔지?”
“아니, 막상 너희들 보니까 나 혼자 가기도 그렇구. 그냥 있을까 생각중인데….”
“앗, 정말?”
나와 소희가 동시에 소리쳤다. 고개를 끄덕인 효진이언니가 우리에게 물었다.
“너희들, 오늘은 여기서 자고 갈 거라 했지?”
“응. 그거라면 걱정 없는데….”
“아니 아니, 문제는 시간이 별로 없다는 거야. 문장대에 올라갔다 내려온 뒤에도 조금 쉬어야 할 거고, 아직 볼거리도 많이 남아있으니까….”
“빨리 올라가야 하는 거야?”
“그래, 그거야. 그런데 언니는 괜찮아도 너희들 체력이 받쳐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이래봬도 저 끝까지 올라가는 거, 지금 상태로는 힘들꺼야.”
“괜찮아!”
나보다도 소희가 먼저 대답했다. 그리고는 문장대로 오르는 높은 왼쪽 길목으로 냅다 달리는 것이다. 조금 멀리까지 뛰어 간 소희는, 얼른 오라는 듯 저 멀리서 손을 흔들었다.
하여간 나서는 건 제일 먼저야….
나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다가 효진이언니와 눈이 마주쳤다. 언니가 미소를 지으면서 내 손을 잡아주었다. 눈이 꼭 ‘힘내’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우리는 소희의 뒤를 따라 거의 뛰다시피 출발을 시작했다.
* * *
“헉헉….”
30분 정도가 흘렀다. 벌써부터 숨이 차올라 주저앉고만 싶었다. 하지만 남은 거리가 얼마 남지 않다 생각하니 다시 힘이 났다. 나는 한발 한발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푸른 공기가 온 몸에 상쾌하게 스며들었다.
“잠깐만….”
갑자기 희미한 소리가 들렸다. 소희였다. 내 옆에서 걷고 있던 소희는 어느새 저만치 뒤에
서 걷고 있었다. 힘이 제일 빨리 제일 앞장서서 걸으려고 하던 애가 저게 뭐람.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은근히 걱정이 된 나는 뒤로 돌아가 소희 앞에 섰다.
“많이 힘들어?”
“아니, 그건 아닌데…."
“그럼 빨리 일어나. 얼마 안 남았는데 아깝잖아.”
나는 손짓으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문장대 정상을 가리켰다. 아니, 가까이 왔으니 이제는 문장대이다. 그 모습을 보았다면 이쯤까지 와서 돌아갈래야 돌아갈 수가 없다. 나는 소희에게 손을 내밀어주었다. 힘겹게 숨을 고르던 소희가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갑자기 활짝 웃는 것이다.
“고마워.”
“뭐가?”
“아니, 그냥.”
소희가 몸을 일으켜 세워 다시 걷기 시작했다. 기운을 차린 모양이다. 앞서 있던 효진이언니가 소희의 손을 잡아주었다. 나도 그 옆으로 얼른 쫓아가 효진이언니의 손을 잡았다.
그 이후로는 다리가 아프거나, 발목이 욱신거린다고는 느끼지 못했다. 산책을 하듯 걸었을 뿐이다. 그렇게 걷고 있으니 주저앉아 쉬는 것보다 오히려 더 편하게 느껴졌다.
보은판타지 (36)
세심정까지 올라오자, 거의 다 올라왔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하지만 그것은 대단한 착각이었음을, 난 미리 알아야만 했다.
세심정을 지날 때에는 두 가지 길이 있다. 나는 물론 문장대로 올라가는 왼쪽 길로 걸었다. 표지판에 문장대까지 올라가는 거리가 4km 남았다고 표시되어있었다. 수많은 등산객이 그 길을 오르고 있었다. 소희와 나는 그 때까지만 해도 4km는 별거 아니라며 코웃음을 쳤다.
사실 처음 길은 굉장히 무난했다. 거의 시멘트길 이었나. 돌이 깔렸다지만 평평했기 때문에 오르는 것이라기 보단 그냥 걷는 것 같았다.
봄이라서 그런가, 조금 쓸쓸한 느낌도 있었지만 산에는 왠지 화사한 분위기가 가득해 걷는 내내 즐거웠다. 문장대를 가득 메우고 있는 개벚나무, 철쭉, 쪽동백, 굴참나무, 생강나무, 서어나무, 졸참나무, 신갈나무, 대팻재나무, 물푸레나무 등의 수많은 나무들 가운데에는 가지가 앙상한 것이 많긴 했지만, 울긋불긋한 나뭇잎들이 조금씩 돋아나있어 알록달록 예쁜 빛을 띠었다.
외길의 울타리 너머에는 물이 졸졸졸 흐르고 있었다. 여러 갈래로 흩어져 흐르는 작은 폭포 소리가 산길 근처에 잔잔히 울려 퍼졌다.
소희와 나, 그리고 효진이언니는 대부분 말없이 길을 걷고 또 걸었다. 다리는 아프지 않았으며 감기가 들릴까 꽁꽁 입고 온 겉옷은 오히려 나를 덥게 만들었다. 기분만으로는 문장대 정상까지 순식간에 오를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 때 갑자기 갈증이 밀려왔다. 산에는 습기가 많으니 물을 마실 일은 별로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었나 보다.
“효진이언니, 물 남은 것 없어?”
“물? 없는데…. 목마르니?”
“응. 갑자기 그래.”
“조금만 참으면 될거야. 문장대에는 휴게소가 많거든. 아마 조금있으면 나올텐데….”
소희가 앞서 살펴보고 오겠다며 얼른 길을 나섰다. 급히 뛰어간 소희가 저 앞에서 크게 소리쳤다.
“저기 파라솔이 보이는데? 휴게소 맞는 것 같아!”
“아, 휴게소가 가까운가 보다. 조금만 힘내자.”
“응.”
나는 효진이언니와 함께 빠른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소희 말대로 얼마 가지 않아 휴게소가 나타났다. 아까 전, 세심정에서의 휴게소 이후로 처음 만난 휴게소였다. 휴게소는 한쪽에 자리잡아있었고, 세심정처럼 길이 두갈래로 나뉘었다. 음식점에서는 음식을 먹는 관광객들이 굉장히 많았다. 3시가 넘어가는 때였는데도 말이다.
나와 효진이언니, 소희는 알록달록한 파라솔 밑에 자리를 잡았다. 플라스틱 의자에 우리를 앉혀놓고 식탁에는 가방을 내려놓은 효진이언니가 지갑을 챙기며 말했다.
“자, 그럼 언니는 얼른 물 사러 갔다올테니까, 여기서 꼼짝말고 기다려.”
그리고는 사람들이 북적이는 사람들 틈으로 섞여 사라져버렸다. 나와 소희는 가만히 앉아 멀뚱멀뚱 그 모습을 지켜보기만 했다. 그때 내 눈에 뜨인 것이 있었다. 바로 표지판이었다.
“소희야. 저거봐.”
“뭘?”
난 멍하니 되묻는 소희를 질질 끌고 표지판 앞으로 다가갔다. 자세히 살펴보니, 표지판에는 앞으로 남은 산행거리가 상세하게 쓰여 있었다. 문장대가 3.2km 남아있다고 하니, 2/5는 올라온 셈이었다.
하지만 꼭 이 길로 문장대만 올라가는 것은 아닌가 보다. 중사자암, 복천암등으로 올라가는 길은 문장대와 같은 왼쪽이었고, 상환암이나 천황봉으로 올라가는 길은 문장대와 반대인 오른쪽이었다.
“뭐하고 있어-?”
의외로 금새 달려온 효진이언니가 내 앞에 물 하나를 내밀고, 소희에게도 하나 건네면서 말했다. 나는 그냥 아무것도 아니라고 고개를 저었고, 소희가 효진이언니에게 앞으로 3km가 남았다고 말해주었다.
“3km?"
"응. 3km"
“그럼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네! 어서 서둘러야 날 저물기 전에 돌아올 수 있을거야.”
지금은 밝은 대낮인데, 문장대의 정상까지가 그렇게 까지도 먼 것일까? 혹시…. 괜히 따라나선 거 아냐?
이런저런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나는 효진이 언니에 의해 끌려가듯 가파른 산길을 달려야만 했다.
보은판타지 (37)
지금은 밝은 대낮인데, 문장대의 정상까지가 그렇게 까지도 먼 것일까? 혹시…. 괜히 따라나선 거 아냐?
이런저런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나는 효진이 언니에 의해 끌려가듯 가파른 산길을 달려야만 했다.
세심정을 지나온 후로는, 비교적 평탄했던 시멘트 길이 사뭇 달라졌다. 자잘한 돌멩이며 자갈이 우르르 깔려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 위를 작은 나뭇잎들이 수북히 덮고 있는 터라 오히려 솜이불을 밟듯 푹신한 느낌이다.
양 옆으로 끝없이 펼쳐진 갈색 울타리는 아직 길이 많이 남았음을 알려주고 있다. 물론 밋밋한 울타리들만 있었다면 가는 길에 지루함을 느꼈을 테지. 사실 세심정을 지난 후 정말 마음에 드는 것이 있었다면, 그것은 바로 길 곳곳에 얼굴을 내민 해사한 얼굴들이었다. 막 봄을 맞아 깨어나기 시작하는 꽃들의 알록달록한 꽃잎. 작고 소박하긴 했으나 지금까지의 묵묵하고 차가웠던 분위기와 충분한 대조를 이뤄 훨씬 아름답게만 보였다. 마치 동화같은 분위기였다고나 할까.
그런데 이러한 주위 풍경에도 불구하고 내 옆은 조용하기만 했다. 이쯤이면 소란스러울 때가 됐는데.
“소희야?”
난 슬쩍 옆을 돌아보았다. 얘가 활달하지도 않고, 갑자기 왜 이러지?
소희는 기운이 쭉 빠진 것 마냥,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있었다. 아까는 마냥 좋아하기만 했으면서 말이다. 내심 걱정이 된 나는 눈치를 보며 물어보려고 했지만, 다행이도 소희가 먼저 한 발 앞서 대답해주었다.
“나, 다리에 쥐났어.”
그렇구나. 산에서 쥐가 났다면야. 어디 평소에 쥐난 것과 똑같은 아픔이겠는가? 발바닥뿐만이 아니라 온 몸에 전기가 오르듯 따끔따끔 할 것이다.
나는 가방에서 물병을 꺼내 소희에게 내밀었지만, 소희는 힘없이 고개를 내저으며 사양했다.
안되겠다 싶었던 나는 앞에서 걷고 있던 효진이언니 쪽으로 얼른 달려갔다.
“언니?”
“응?”
효진이언니가 뒤를 돌아보았다. 나는 언니 옆에 착 달라붙어 언니가 들고 있는 미니 팸플릿을 살펴보았다. 문장대 근처에서 발급되어 무료로 나누어지는 것인데, 속리산의 전체 팸플릿에선 한 부분에 불과한 문장대의 모습을 아주 자세히 확대한 것이라 할 수 있었다. 거기엔 문장대의 주로 식생 하는 동식물과 지나쳐선 안 될 볼거리. 또 요새 들어 부쩍 넓어진 길을 등산객이 잃어버리지 않게 하게끔 하는 자세한 지도까지 나와 있었다. 아까 소희와 나는 무심코 지나쳤던 것인데, 효진이언니는 용케도 챙긴 모양이다. 하기야, 언니는 워낙에 꼼꼼한 성격이니까.
지도로 보아하니, 다행이도 두 번째 휴게소는 그리 멀지 않는 곳에 있는 듯싶었다.
조금 뒤에 다리가 나왔다. 그런데…. 조금 특이했다.
“…언니, 언니. 저게 정말 저 다리의 진짜 이름이야?”
“응? 응. 하하, 하긴…. 나도 들어는 봤는데 진짜일 줄은 몰랐다.”
다리의 이름은 다름 아닌 ‘이뭣고다리’였다. 도대체 뭐가 ‘이뭣고’란 말인지. 짧고 굵은 다리의 모양과도 아무런 상관이 없어 보이는데.
긴 것도 아니고 넓은 것도 아니라 그다지 별 볼일은 없는 다리다. 하지만 이마저도 커다란 문장대의 퍼즐판 가운데에선 중요한 한조각인 것 같다.
나는 이제 다리를 떨기 시작하는 소희를 부축해 조심조심 다리를 건넜다. 그러자 아주 크고 가파른 길이 나온다. 뭐랄까, 사람들이 막 북적거리고 있는 것이 마치 지하철의 높은 계단 같다. 게다가 이젠 아주 온몸이 저릿저릿하다며 나에게 업히다시피 하는 소희를 데리고 그 높은 길을 올라간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진짜 이게 아픈 것만 아니었으면 머리라도 한 대 콩 쥐어박는 건데.
저절로 숨이 차는 그 길을 오르고 나서야 저 멀리로 휴게소가 보인다. 벌써 나타나다니. 사실 깜짝 놀라면서도, 반갑지 않을 수가 없어 입이 함지박만큼 벌어졌다.
“소희야, 뛰자!”
“야, 나 쥐났다니까….”
발을 질질 끄는 모습이 안쓰럽다기보다는 얄밉다. 저게 자꾸…. 좀 빨리 올 것이지. 나는 이렇게 열심인데.
결국 뒤따라 온 효진이언니가 같이 부축을 해준 후에야 도착했다. ‘용바윗골 휴게소.’ 세심정 이후로 처음만나고, 문장대에 올라온 뒤로는 두 번째로 만난 휴게소였다.
보은판타지 38
“야, 나 쥐났다니까….”
발을 질질 끄는 모습이 안쓰럽다기보다는 얄밉다. 저게 자꾸…. 좀 빨리 올 것이지. 나는 이렇게 열심인데.
결국 뒤따라 온 효진이언니가 같이 부축을 해준 후에야 도착했다. ‘용바윗골 휴게소.’ 세심정 이후로 처음만나고, 문장대에 올라온 뒤로는 두 번째로 만난 휴게소였다.
졸졸 흐르는 계곡물 소리가 휴게소 전체를 청아하게 울렸다. 이곳은 바로 용바윗골 휴게소. 방금 이 곳에 도착한 나와 소희, 그리고 효진이언니는 울긋불긋한 파라솔 밑으로 얼른 자리를 맡았다. 이상하게도, 처음 지나쳤던 세심정휴게소보다 차는 적었지만 사람은 많아 자리경쟁이 치열해 자리 잡기가 더 어려운 듯 했다. 우리는 운이 좋은 축에 속했다.
“우와, 여기 의외로 경쟁이 심하다.”
아픈 것도 다 잊어버렸는지, 소희가 토끼눈을 하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럴 만도 하겠지. 나도 의외였으니까.
알록달록한 색동무늬의 파라솔은 확실히 그 수가 세심정 때보다도 불어났고, 사람들 역시 꽤나 북적거렸다. 그 덕에 신이 나는 건 장사치 아주머니와 아저씨들이셨다. 미지근한 녹차와 따뜻한 보릿물, 그 외의 한약차를 파는 소박한 찻집은 밀려드는 주문으로 인해 그 어느 때보다도 성황이었다. 따뜻한 김이 오르는 찻잔을 받아든 사람들은 솔잎이 우거진 소나무 아래 예쁘게 장식된 나무 탁자에 앉아 잠깐의 여유를 즐겼다. 모든 사람의 얼굴에 보일 듯 말 듯한 미소가 어려 있던 것이 바로 그 때문이었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언니, 여기엔 비상약이나 차 같은 거 말곤, 다른 거 안 팔아?”
“예를 들면 어떤 거?”
“아이스크림이나 과자, 어른들한테는 술…. 아, 술은 원래 안 팔지도 모르고. 어쨌든 간에, 아이스크림이나 과자 같은 게 안보이잖아. 아차. 컵라면도.”
소희 역시 동감하며 언니에게 물었다. 왜 그런 것들을 팔지 않느냐고. 그러자 언니는 왜 당연한 걸 모르고 있느냐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한다.
“그거야…. 등산객한테 좋을 게 없는 것들이니까.”
“무슨 말이야?”
“생각해봐. 아직 쌀쌀한 날씨에 산에 오르면서 아이스크림이라니…. 게다가 컵라면이나 과자는 먹고 올라가면 가다가 속이 되려 상할 수도 있으니까 팔지 않는게 당연하지.”
아, 그렇게 생각할 수도…. 옛날에는 팔았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런 이유로 이제는 아예 팔지 않는구나.
그런데, 갑자기 효진이언니가 깜짝 놀라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소희 너, 다리 저리다고 하지 않았어?”
아, 맞다. 그랬었지. 나는 소희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런데…. 왠지 지금은 멀쩡해 보인다. 과연, 소희는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손사래를 쳤다. 저게 진짜…. 설마 꾀병?
“야, 너 꾀병이지!”
“무슨 소리야. 불과 몇 분 전까지만 해도 엄연한 환자였다구.”
말하는 게 왠지 얄밉다. 나 참, 소희가 아프지 않다면 여기서 시간 끌 이유도 없는 거잖아. 나는 벌떡 일어섰다.
“뭐야. 벌써 가게?”
“그럼! 너 안 아프면 당연히 가야되는 거 아냐?”
“그건 그렇지만….”
편한 상태에서 일어서는 것이 영 아쉬운 모양이었다. 나는 느릿느릿 일어나는 소희 앞에 서서 앞장서려 했다. 그런데….
“…이게 뭐야?”
갑자기 다람쥐 몇 마리가 나타났다. 더불어 토끼 몇 마리도 함께 있었다. 잠깐만, 원래 사람에게 이렇게 친근하게 다가오는 동물이 다람쥐와 토끼였던가? 그건 아닌것 같은데.
“작은 이벤트야.”
“응?”
어느새 내 옆으로 다가온 효진이언니가 궁금증을 해소해주려는 듯 입을 열었다.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알아서 척이었다.
“다람쥐나 토끼를 길들여서 이런 곳에 방목하는 거…. 애들이 무서워하지도 않고 꽤나 깨끗하게 관리시키고 있는 귀여운 동물들이니까. 물론 사람들이 해칠 수 없게 적당히 보호도 하고 있어. 이런 다람쥐나 토끼를 해치면 벌금이 상당할걸?”
그런거구나…. ‘자연과 함께하는 산행’의 참의미는 바로 이것일지도 모른다. 옆을 졸졸졸 따라다니는 동물과 길을 걷다니, 참 색다른 기분이다. 항시 내 옆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타났다 사라졌다를 반복하니 그리 부담스러운 느낌도 아니었다.
보은환타지(39-40) 2007-12-14 09:27:28
그런거구나…. ‘자연과 함께하는 산행’의 참의미는 바로 이것일지도 모른다. 옆을 졸졸졸 따라다니는 동물과 길을 걷다니, 참 색다른 기분이다. 항시 내 옆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타났다 사라졌다를 반복하니 그리 부담스러운 느낌도 아니었다.
그런 가뿐한 기분과 함께, 한 참을 또 걸었다. 조금 숨이 차기는 했지만, 2.5km 정도가 남은 상태에서 기운이 빠지진 않았다. 높고 가파른 돌길에 다다랐기 때문에 숨이 차는 것뿐이었다.
가만, 그러고 보니…?
바로 여기가 그 헐떡 고개가 아닌가 싶었다. 이뭣고다리를 지나고 가파른 돌길을 걸었으니, 분명 가까워졌다는 것만은 확실할 것이다. 게다가 지금만 해도 분명 숨이 헐떡이는 느낌이 든다.
바로 앞에 크고 작은 돌들로 만들어진 지그재그길이 있었다. 힘이 빠져 비실대는 소희를 거의 부축하다시피 하긴 했지만, 효진이언니의 뒤를 따라잡으며 걸은 덕분에 훨씬 수월하게 빠져나갔다. 그러자 이번에는 잘 다듬어진 네모난 돌계단이 나온다. 왼 편에 작은 담장에는 귀여운 다람쥐 모양이 그려진 표지판까지 앙증맞게 걸려있다.
“이건 마스코트인가?”
나는 다람쥐 그림을 가리키며 효진이언니에게 물었다. 효진이언니가 고개를 갸웃한다.
“글쎄, 그 정도 까지는 아닌 것 같다.”
그렇구나. 고개를 끄덕인 나는 또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이번에는 또 소희가 말썽이다.
“우와, 신기하다. 그림이 되게 많은데?”
높게 쌓아 올린 돌담에 걸린 그림 몇 점에 흥미가 간 모양이다. 남들은 눈요깃감으로 가볍게 넘기는데, 또 진지하답시고 그걸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다.
“야, 빨리 와!”
“잠깐만~ 이것 좀 보구. 우와, 여기 문장대 전체를 찍은 대형 사진도 있어….”
그렇게 한참을 기웃거린 끝에야 만족했는지, 10분쯤 지났을 때야 걸음을 옮기는 소희였다. 자세히 보니 사진기를 들고 있었다. 그 새 그 걸 몽땅 찍어버린 모양이다.
다시 천천히 걸으면서 디지털 카메라에 저장된 사진을 살펴보던 소희가 나에게 대뜸 말했다.
“아깝지 않아?”
“뭐가?”
“이런데서 그림 보는 건 되게 색다른 경험인데 그냥 넘겨버리고 마는게….”
“넌 안넘겼잖아.”
“나는 그렇다 쳐도. 다른 사람은 아까울 거 아냐.”
웬일인지 조금 심각하기도 하다. 하지만 나는 뭘 그거가지고 그러냐는 생각뿐이었다. 속리산이나 문장대엔 그깟 거 빼고도 볼 게 엄청 많은데. 신경 쓸 리가 없다.
“얼른 걷기나 해.”
다급한 마음에 소희를 재촉했다. 이렇게 계속 늑장만 부리다보면 돌아오는 길이 시간을 훌쩍 넘길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문장대의 길이 예전보다 더 부드럽고 평평해지길 망정이지, 옛날 그대로였다면 새까만 밤이 돼서도 못 내려왔을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소희는 뭔가 영 불만에 차있는 듯 했다.
우리를 천천히 기다리고 있던 효진이언니와 손을 잡은 뒤, 이번에는 좀 좁아 보이는 돌길을 건넜다. 자갈과 함께 우둘투둘하고 굵은 나뭇가지에 덮여있어서 그런가, 굉장히 걷기가 어렵다. 울퉁불퉁해서 말이다.
하지만 길을 건넌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조금 색다른 것이다.
굴참나무, 산뽕나무, 비목나무, 금강소나무…. 각각 예쁜 이름과 함께 각기 다른 생김새를 가지고 있는 수많은 나무들이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왔다. 우와, 이렇게 따로 구분하는 것을 매겨 놓은 게 신기할 정도였다.
효진이언니와 나와 소희는 예쁘게 다듬어진 나무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 이후로는 돌판이 많은 너른 길이 나왔는데, 중간 중간마다 앉아 쉬기가 좋아 아주 편했다. 그런데 길이 좀 한 참 길게 이어졌다. 길이 끝나갈 즈음에 우리의 코를 자극한 게 바로 고기냄새였다. 또 다른 휴게소가 멀지 않은 것이었다. 이번 휴게소를 오른 뒤 한번만 더 오른다면, 분명 나머지 길은 얼마 남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니 뛸 듯이 기뻤다. 당장이라도 달려가고 싶은 마음이었다.
고기 굽는 냄새가 점점 가까워지는 가 싶더니 또 다시 멀어져버렸다. 내가 기대했던 휴게소는 아닌 모양이다. 전기불판(불이 아니라 전기로 달구어지는 불판)에 고기를 굽는 소리 같아 기대를 했는데.
“솔직히 매번 들를 필요는 없잖아. 길도 여러 갈래로 나뉘어 있는데 굳이 휴게소 쪽으로 갈 필요도 없고.”
소희가 실망하는 나를 보며 위로하듯 말했다. 그다지 와 닿는 건 아니지만, 맞긴 맞는 말이었다.
“자, 그럼 다시 움직이자! 힘낼 수 있지?”
효진이 언니가 큰 소리로 다를 다독여주었다. 나도 모르게 지친 표정을 지었던 모양이다. 나 말고 다른 사람의 힘까지 빠지게 한 것 같아 괜시리 미안해졌다.
내가 가장 앞에 서서 걸음을 옮겼다. 고개를 푹 늘어뜨린 채 말이다. 이상하게도 몸에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뭔가가 몸에서 쑥 빠져나간 듯한 기분이었다.
“어, 잠깐만.”
가느다랗게 들리는 효진이언니의 목소리에 걸음을 뚝 멈춘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길게 이어져 있는 높은 계단을 막 올라오고 난 직후였다.
“왜 그래?”
“여기 와서 저것 좀 봐봐!”
효진이언니는 먼 산을 가리키며 카메라를 꺼내들고 있었다. 다시 뒤로 간다는 것이 귀찮기는 했지만, 갑자기 왜 저러나 싶어 궁금해진 나는 효진이언니의 곁으로 바짝 다가갔다.
“우와….”
나는 그 순간 탄성을 내지를 수밖에 없었다.
효진이언니가 가리킨 것은 다름 아닌 문장대 바로 그 자체였다. 짧은 거리를 두고 있는 문장대의 정상이 왠지 바로 눈앞에 있는 듯해 비현실이기까지 했다. 그 만큼 대단했고 현실감 있었다.
문장대를 왜 운장대라고 부르기도 하는지 이제야 그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것은 당연한 것이다. 구름에 둘러싸인 신비스런 산봉우리의 모습을 ‘구름 운(雲)’자가 들어간 운장대 말고 도대체 어떤 말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기분이 좋아지지 않아?”
효진이 언니가 생긋 웃으며 물었다. 나도 모르게 고개가 끄덕여졌다.
사실, 그 말 대로 문장대의 정상 모습을 멀리서 보기만 했는데도 가슴이 뻥 뚫린 듯한 시원한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그것은 굉장히 이상하면서도 기분 좋은 느낌이었다.
“…자. 그럼, 일단 네 기분 푸는 데는 성공한거네?”
효진이 언니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나는 깜짝 놀라 언니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내 기분이 별로인 건 어떻게 알았어?”
“그냥. 표정이 그랬어.”
갑자기 뭉클한 기분이었다. 내 기분을 일일이 확인해주는 언니랑 여행을 한다는 게 이렇게 좋은 일인 줄 몰랐다.
사실, 언니와는 처음부터 약속을 하고 여행을 한 게 아니라 중간에 합류한 것이기 때문에,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다시 한 번 언니와 함께 여행을 해보고 싶었다.
“자, 그럼 다시 앞장 서!”
언니는 내 어깨를 척 잡더니 앞으로 스윽 돌려주었다. 아까보단 훨씬 더 힘이 난 나는 조금 더 씩씩하게 걸음을 옮겼다. 이번에는 결코 포기하지 않고 1km를 전진할 때까지 불평하는 소리는 하지 않으리라. 나는 나 혼자 다짐하듯 중얼거리며 생각했다.
보은판타지 40
“야, 나 쥐났다니까….”
발을 질질 끄는 모습이 안쓰럽다기보다는 얄밉다. 저게 자꾸…. 좀 빨리 올 것이지. 나는 이렇게 열심인데.
결국 뒤따라 온 효진이언니가 같이 부축을 해준 후에야 도착했다. ‘용바윗골 휴게소.’ 세심정 이후로 처음만나고, 문장대에 올라온 뒤로는 두 번째로 만난 휴게소였다.
졸졸 흐르는 계곡물 소리가 휴게소 전체를 청아하게 울렸다. 이곳은 바로 용바윗골 휴게소. 방금 이 곳에 도착한 나와 소희, 그리고 효진이언니는 울긋불긋한 파라솔 밑으로 얼른 자리를 맡았다. 이상하게도, 처음 지나쳤던 세심정휴게소보다 차는 적었지만 사람은 많아 자리경쟁이 치열해 자리 잡기가 더 어려운 듯 했다. 우리는 운이 좋은 축에 속했다.
“우와, 여기 의외로 경쟁이 심하다.”
아픈 것도 다 잊어버렸는지, 소희가 토끼눈을 하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럴 만도 하겠지. 나도 의외였으니까.
알록달록한 색동무늬의 파라솔은 확실히 그 수가 세심정 때보다도 불어났고, 사람들 역시 꽤나 북적거렸다. 그 덕에 신이 나는 건 장사치 아주머니와 아저씨들이셨다. 미지근한 녹차와 따뜻한 보릿물, 그 외의 한약차를 파는 소박한 찻집은 밀려드는 주문으로 인해 그 어느 때보다도 성황이었다. 따뜻한 김이 오르는 찻잔을 받아든 사람들은 솔잎이 우거진 소나무 아래 예쁘게 장식된 나무 탁자에 앉아 잠깐의 여유를 즐겼다. 모든 사람의 얼굴에 보일 듯 말 듯한 미소가 어려 있던 것이 바로 그 때문이었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언니, 여기엔 비상약이나 차 같은 거 말곤, 다른 거 안 팔아?”
“예를 들면 어떤 거?”
“아이스크림이나 과자, 어른들한테는 술…. 아, 술은 원래 안 팔지도 모르고. 어쨌든 간에, 아이스크림이나 과자 같은 게 안보이잖아. 아차. 컵라면도.”
소희 역시 동감하며 언니에게 물었다. 왜 그런 것들을 팔지 않느냐고. 그러자 언니는 왜 당연한 걸 모르고 있느냐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한다.
“그거야…. 등산객한테 좋을 게 없는 것들이니까.”
“무슨 말이야?”
“생각해봐. 아직 쌀쌀한 날씨에 산에 오르면서 아이스크림이라니…. 게다가 컵라면이나 과자는 먹고 올라가면 가다가 속이 되려 상할 수도 있으니까 팔지 않는게 당연하지.”
아, 그렇게 생각할 수도…. 옛날에는 팔았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런 이유로 이제는 아예 팔지 않는구나.
그런데, 갑자기 효진이언니가 깜짝 놀라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소희 너, 다리 저리다고 하지 않았어?”
아, 맞다. 그랬었지. 나는 소희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런데…. 왠지 지금은 멀쩡해 보인다. 과연, 소희는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손사래를 쳤다. 저게 진짜…. 설마 꾀병?
“야, 너 꾀병이지!”
“무슨 소리야. 불과 몇 분 전까지만 해도 엄연한 환자였다구.”
말하는 게 왠지 얄밉다. 나 참, 소희가 아프지 않다면 여기서 시간 끌 이유도 없는 거잖아. 나는 벌떡 일어섰다.
“뭐야. 벌써 가게?”
“그럼! 너 안 아프면 당연히 가야되는 거 아냐?”
“그건 그렇지만….”
편한 상태에서 일어서는 것이 영 아쉬운 모양이었다. 나는 느릿느릿 일어나는 소희 앞에 서서 앞장서려 했다. 그런데….
“…이게 뭐야?”
갑자기 다람쥐 몇 마리가 나타났다. 더불어 토끼 몇 마리도 함께 있었다. 잠깐만, 원래 사람에게 이렇게 친근하게 다가오는 동물이 다람쥐와 토끼였던가? 그건 아닌것 같은데.
“작은 이벤트야.”
“응?”
어느새 내 옆으로 다가온 효진이언니가 궁금증을 해소해주려는 듯 입을 열었다.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알아서 척이었다.
“다람쥐나 토끼를 길들여서 이런 곳에 방목하는 거…. 애들이 무서워하지도 않고 꽤나 깨끗하게 관리시키고 있는 귀여운 동물들이니까. 물론 사람들이 해칠 수 없게 적당히 보호도 하고 있어. 이런 다람쥐나 토끼를 해치면 벌금이 상당할걸?”
그런거구나…. ‘자연과 함께하는 산행’의 참의미는 바로 이것일지도 모른다. 옆을 졸졸졸 따라다니는 동물과 길을 걷다니, 참 색다른 기분이다. 항시 내 옆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타났다 사라졌다를 반복하니 그리 부담스러운 느낌도 아니었다.
보은판타지 41
마지막 정상까지 남은 거리는 채 100m도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그 짧은 거리가, 지금까지 걸어온 그 몇 km보다도 넘기 힘들었다. 힘을 내서 올라가다가도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는 일이 몇 번이고 반복되었다.
바로 저 앞에 정상이 있는데….
소희와 효진이언니가 옆에서 도와주는 데 힘입어 입을 악물고 한 걸음 한 걸음을 옮겼다. 자꾸만 속이 울렁거리고 눈물이 나려 했다.
그렇게 몇 걸음 몇 걸음, 울퉁불퉁한 바위를 디뎌 더 올라가고 나서…….
“저거 봐! 계단이다!”
드디어 계단이 보였다. 마지막으로 저것만 밟고 올라서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계단을 오르는 것 자체도 고역이었다. 작은 배려인 듯, 계단이 물렁물렁한 고무판이긴 했지만, 그것조차도 디디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마침내….
‘…다 올라왔다.’
“정상이다! 정상이야!”
소희의 외침과 동시에 갑자기 풀리는 다리의 긴장 때문에, 나는 그 자리에서 기뻐하기는커녕 스르륵 주저앉고 말았다. 하지만 머리가 하얗게 변해가는 순간에도, 문장대라는 글씨가 똑똑히 새겨진 비석만큼은 두 눈에 똑똑히 보였다. 마침내 해낸 것이다.
“일어서자.”
효진이언니가 차마 일어서지 못하는 나를 향해 다정스레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 손 덕분에 자리를 털고 일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언니는 나를 일으켜 준 것만으로는 손을 놓지 않았다.
“자, 저기 가보자.”
도저히 다리에 힘을 줄 만한 용기는 없었지만, 언니가 워낙 재촉하는 바람에 나는 문장대의 솟은 큰 바위 위로 질질 끌려가다시피 올라갔다. 그리고 바로 그때, 언니가 내게 놀라운 사실을 가르쳐 주었다.
“그거 알아?”
“…응? 뭘?”
“우리가 지금, 단 한 발자국만으로 도(道) 경계가 다르다는 거.”
“뭐?”
갑자기 무슨…. 도통 이해할 수 없는 말에 나는 그 뜻이 뭐냐고 물어보려 했는데, 미처 그럴 틈도 없었다. 그 커다란 바위에 올라온 순간 보이는 풍경에 넋을 잃고 만 것이다.
형형색색….
그래, 처음 본 순간의 느낌은 바로 그렇게 표현하는 것이 옳았다. 원래는 초록빛 하나로 물들어 쓸쓸해 보여야 했던 산이, 정말이지….
“…예쁘다.”
그래, 바로 그랬다.
예전의 그 외로웠던 산의 모습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오가는 케이블카나 그 아래에서 빠르게 움직이는 은빛 경전철, 게다가 하늘 이곳저곳을 장식하는 커다란 무지갯빛 풍선에 수많은 사람들. 그 모든 것을 품고 있는 푸른 녹색의 산은 더 이상 쓸쓸하지 않았으며, 그 어느 때보다도 활기차 보였다.
그리고 문득, 그 풍경을 정신없이 바라보고만 있던 나는 아주 이상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
…여기에선 보일 수가 없는 풍경이 눈앞으로 휙휙 스쳐지나가는 것이다.
아주 예전의 일인 것만 같은, 오늘 아침 보았던 정류장 앞의 수많은 자동차들. 감탄이 저절로 나왔던 말티재 관문.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아름다운 호수를 보여준 리프트….
편안하면서도 아찔한 느낌으로 내게 설레임을 안겨주었던 청룡열차. 청룡열차에 앉아 보았던 꽃무리들. 그리고… 속리산으로 넘어와서 보았던 커다란 잔디공원. 아이스필름으로 만든 스케이트장.
또 직접 잡은 송어로 해결한 맛있는 점심과…. 오리숲과 문장대에 오기 전 보았던 수많은 사람들과 주변풍경. 처음 타 보았던 경전철의 부드러운 느낌.
그것까지 떠올리게 된 순간 갑자기 정신이 아찔해졌다. 굉장히 기분이 짜릿하고 즐거운 것이다. 짧은 하루의 시간동안, 이렇게 맘에 드는 여행을 한 것은 아마 이번이 처음일 것이다.
더 재미있게 즐겼으면 하는 아쉬움도 남지만…. 여기가 끝일 것 같다. 난 문장대 아래로 내려가자마자 곧장 집으로 돌아가야 할 테니까.
아쉬운 만큼 다음에 을 때는 좀 더 재밌게 즐기다 갈 수 있길….
[ 처음 완결해보는 글, 생각해 놓았던 내용을 다 적지 못해 아쉬움도 많이 남지만, 짧지만 길었던 이 이야기는 여기서 이만 마칩니다. 부족한 글이나마 읽어주셨던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
보은e뉴스 admin@boeunenew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