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이품송(正二品松)이 안고 있는 슬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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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품송에 관한 일화는 유명하다. 조선의 7대왕 세조는 속리산 법주사로 행차하던 길에 커다란 소나무 하나를 발견하고 “연(輦) 걸린다”고 염려했다. 그러자 이 소나무는 스스로 가지를 번쩍 들어 올려 어가(御駕)가 무사히 지나갈 수 있게 했다.
자신이 싹틔운 자리에 깊게 뿌리를 박고 서있던 소나무가 보여준 사람 못지않은 충정에 감동한 세조는 정2품에 해당하는 품계를 하사했고, 이러한 연유로 지금의 정이품송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이렇듯 관련된 배경설화를 제외하고서라도, 정이품송은 한 때 그가 지닌 수려한 자태만으로도 주목을 받았다. 원추형 수형은 우산을 펼쳐놓은 듯 아름다웠고, 빼어난 수세는 전국의 어느 소나무와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유일무이 했다.
그런 정이품송도 가는 세월과 주변개발을 견디지 못한 채 많이 쇠약해진 모습을 보이고 있어 주위를 안타깝게 하고 있다.
병충해의 습격으로 인해 여러차례 몸살을 앓았고, 우람했던 가지들은 비바람과 폭우에 꺾이고 상했다. 그 결과 원추형의 자태의 절반이 소실되어 안타까움을 더했다.
이 같은 아픔으로 사람들의 관심은 한 때, 정이품송의 후계목(장자목)을 찾는 것으로 쏠렸다.
노쇠한 연유이든, 관리하는 사람들이 무지해서건, 환경적 영향이던 간에 어쩔 수 없이 정이품송의 대체목과 후계목을 찾게 된 것이 1980년대 초다.
당시 많은 이들은 정이품송의 수세가 악화된 원인을 찾기보다 대체목과 후계목을 찾기에 더 열중했는지 모른다.
정이품송의 씨앗을 받은 최초의 자목은 모두 7그루이다.
1980년대 충북산림환경연구소가 정이품송에서 채취한 솔방울의 씨앗을 통해 만들어낸 이 자목들은 정이품송의 직계 후손으로 정이품송의 명맥을 이어갈 문화적 재산으로 선택됐다.
그런데 이 자목들은, 오늘날로 말하면 장관급(정2품 품계)에 해당하는 정이품송의 귀한 자손들로서 대접을 받기는 커녕 더할 나위 없이 천대를 받고 있다.
최초의 자목 7그루 중 보은군청으로 옮겨졌던 자목에는 설화속의 정이품송과 꼭 빼닮은 가지가 하나(연걸이 소나무) 자라고 있었다.
옆구리에 길게 늘어진 나뭇가지 하나는 옛날 세조가 지병치료차 속리산을 행차할 시 연(輦)을 걱정하게 만들었던 소나무의 가지만큼이나 닮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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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를 관리하던 공무원은 전설속의 연걸이 소나무를 상상할 수 있는 귀한 가지를 주위의 귀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최근 싹둑 잘라버렸다.
장자목을 정이품송의 대를 잇기 위한 소중한 후계목으로 보지 않고 한낮 정원수 정도로만 본 것이다.
말티재 인근의 솔향공원으로 옮겨진 자목도 사정은 별반 다르지 않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곧게 자랐던 자목은 관리자들의 방치 속에 허리가 심하게 구부러져 있다.
주변 환경 또한 커다란 소나무들로 인해 숨을 쉬기조차 거북해 보일 정도다.
여기에다 또 한그루는 모기관의 기념식수로 제공했으니 가히 보은군이 바라보는 정이품송과 장자목의 가치는 어떤 것인지 가늠해 볼 수 있다.
이처럼 정이품송 장자목에 대한 소홀함은 정이품송의 문화적 가치에 대한 천대나 다름이 없다. 수령이 오래됐다는 구실로 정이품송이 쇠약해져가고 가지가 부러지는 것을 당연한 일로 생각해도 될 일인지 되새겨 볼일이다.
장구한 세월 동안 우리 민족의 문화적인 가치를 품에 안고 살아온 역사적 산물인 정이품송을 우리군민은 얼마나 아끼고 사랑하고 있는지 반문하지 않을 수 없다.
지난해 인근 괴산군의 600년 수령 왕소나무가 태풍에 쓰러지고 난후 '모든 동민뿐만이 아니라 괴산 군민·군수 등이 전부 와서 애통해 하고 갔다'는 기사문구 하나가 떠오른다.
머지않아 이 같은 현실이 보은군에서 재현되는 모습은 아닐런지 답답하고 안타까운 심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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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은e뉴스 admin@boeunenews.com













































